현재 나는 3년 전 한 출판사의 부탁으로 쓰기 시작했던 프랑스 최초의 ‘아시아영화사전’을 마무리하고 있는 중으로, 이 책은 드디어 오는 10월 각 서점에 선보일 예정이다. 방대한 분량의 이 작업은 내게 영화지리학적 차원에서 수많은 의문을 던지게 했으며 무엇보다 흔히 말하는 ‘아시아영화’라는 표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지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아시아는 터키에 있는 보스포르 동부 연안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영화의 대국 이란도 아시아 영화권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소리다. 하지만 ‘아시아영화’를 말하면서 중동까지 염두에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기야 어떤 아시아영화제에선 이스라엘영화를 보란 듯이 프로그램에 넣기도 하고, 또 같은 이스라엘영화를 유럽영화제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개 서양에서 ‘아시아’라고 하면 인도에서 시작해서 일본까지 이어지는 지역으로 소통된다. 이 지역은 대략 프랑스 도빌의 아시아영화제에서 다루는 영역이자 이번 ‘ 아시아영화사전’에서 다루고 있는 범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임권택 감독이 칸영화제에서 연출상을 받으면서 그가 받는 상이 “아시아의 모든 영화에 주어지는 상”이라고 표현했을 때, 임 감독이 발리우드의 거부 야쉬 초프라를 염두에 두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더군다나 임 감독 역시 작품 <아다다>를 만든 장본인이 잡다한 뮤지컬 코미디의 기수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 기가 막혀 할 것이다. 임 감독이 말하는 아시아란 흔히 우리가 얘기하는 중국에서 시작되는 극동아시아를 지칭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우디네에서 열리는 극동아시아영화제도 바로 이 지역권 영화를 다루는 영화제다. 그런데도 우디네 지방 사람들도 이 영화제를 가리켜 기꺼이 ‘동양영화페스티벌’(festival del cinema orientale)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프랑스에서 ‘오리엔트’라는 표현은 오랫동안 모로코나 터키 혹은 스페인의 안달루시아를 지칭하던 말이었다. 19세기 오리엔탈리스트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위의 나라들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동양영화권 안에는 더이상 포함되지 않는다.
‘아시아영화’라는 개념이 서양에서 만들어낸 유동성 다분한 개념이란 걸 일단 밝힌 다음, 나는 언급된 각 나라의 지리적 경계선을 독자들에게 분명히 규정해주어야 했다. 처음 편집진은 각 나라 목차마다 그 나라 국기를 그려넣을 생각이었고, 그렇게 만든 초벌마케트는 올림픽 개막식만큼이나 화려했다. 하나 우린 함정에 빠졌었다. 일제시대에 활동하던 한국인 나운규 감독·…. 나 감독에게는 무슨 국기를 달아야 하나? 이 한국영화의 아버지 머리 위에 일본 국기를 달아놓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리트윅 가탁은 또 어떤가? 오늘날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그를 자기네 나라의 가장 위대한 영화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생존시 그는 인도 사람이었다. 가장 미묘한 문제는 중국이었다. 1949년 이전에 활동한 중국영화인들은 어떻게 처리하나? 1997년 이전 홍콩사람들은 영국 국기를 들고 흔들어야 했단 말인가? 1970년대 홍콩영화의 상징이면서 캐나다 여권을 소지했던 전설의 적룡이나 강대위에 대해서는 또 뭐라고 해야 하나?
유럽영화사전을 만든다고 했어도 문제는 분명 마찬가지였을 게다.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경우를 보자. 지금 그는 세르비아 국수주의문화의 기수라고 하지만, 예전엔 유고슬라비아의 대영화인으로 간주됐었다. 그렇다면 영화제의 호화로운 궁전 위에서 펄럭이는 국기들은 어쩌면 언젠가는 바람이 빠질 단순한 고무풍선 같은 것은 아닐까? 지상으로 내려지거나 변색해버리고 마는…. 결국 변하지 않는 건 오로지 작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