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 놀람 지수 ★★★★ 가슴 아픈 지수 ★★★★ 현실 응시 지수 ★★★
구전심수(口傳心受).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는다. 판소리는 마음의 예술이다. 조창화 명창의 말처럼 소리는 말로 내뱉어져 마음으로 수렴된다. 온몸이 굽이치며 내는 소리는 인생의 몇 곡절을 넘어온 것마냥 애환을 담고 흐른다. <소리 아이>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 박수범과 박성열의 소리도 마찬가지다. 아직 초등학생이지만 둘은 소리가 가진 무거운 짐을 온몸에 이고 있다. 풍족한 가정환경에 아버지란 이름의 든든한 지원자를 둔 박수범은 예술에 대한 고뇌, 경험하지 못해 잘 알지 못하는 삶에 대한 질문으로 혼란스럽고,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 행사장을 돌며 노래를 해야 끼니를 때울 수 있는 박성열은 “더럽다”고 이미 아빠가 정해놓은 소리의 길을 주저하며 나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영화는 두 소리 신동의 노래를 아무런 설명없이 들려주지만 둘을 둘러싼 이런저런 환경은 그들의 소리가 어른의 그것 못지않게 힘든 곡절을 지나 울려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같이 판소리를 하고 있지만 박성열과 박수범의 삶은 너무 다르다. 박수범이 이름난 명창 아래 교육받으며 곧 찾아올 변성기를 고민하는 것과 달리 박성열은 명창이 되지 못한 아빠의 실패담을 들으며 행사장을 전전한다. 영화는 둘의 삶을 교차로 보여주는데 여기서 예술이 처한 극과 극의 상황이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살기 위한 예술이냐, 삶을 위한 예술이냐. 같은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임에도 둘의 소리는 그 음색마저 다르다. 박수범이 좀더 품이 넓은 영역대로 여유롭게 창을 한다면 박성열은 아빠에게 맞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내몰리듯 소리를 뱉는다. 심지어 성열의 아빠는 그에게 <흥부가>의 한 대목을 가르치며 “내가 너 때릴 때 어떻게 때렸는지” 떠올리며 노래를 부르라 명한다. 하지만 백연아 감독은 둘의 차이를 의도적으로 대조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아이의 표정, 감정 상태를 포착하기 위해 클로즈업을 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둘의 삶을 관망하듯 밖에서 머문다. 감독이 아이에게 건네는 질문들도 특정한 의도를 가진 것이라기보다 아이의 입을 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두 아이 중 그 누구에게도 기울어지지 않은 채 카메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평을 유지한다.
한국에서 판소리의 세계는 사실 풀리지 않은 한의 응어리기도 하다. <소리 아이>에서도 두 아이 뒤에는 아빠란 이름의 두 남자가 있다.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에게 투영시키는 이들의 모습은 그것이 발전적이든 그렇지 않든 대물림이란 점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다. 또 나이 어린 소년이 40이 넘어야만 트일 수 있다는 판소리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감당할 수 없는 예술의 무게를 짊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로 박성열의 삶을 보면 예술이란 이름으로 치러지는 어린 시절의 희생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예술과 성장과 삶. <소리 아이>는 두 아이의 소리를 통해 어른이 풀기에도 버거운 삶의 질곡들을 돌이켜본다.
tip/영화 속 박성열의 삶은 예술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아동폭력이라 할 정도로 지켜보기 힘들다. 폭력적인 아버지에, 직접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까지. 그는 2007년 SBS 오락프로그램 <놀라운대회 스타킹>에서 판소리 신동으로 출연했는데, 이를 본 한 자선사업가의 도움으로 현재는 명창 아래서 본격적인 판소리 교육을 받고 있다고 한다.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