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탓에 불온서적에 관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는 학교 앞 서점이 온통 사회과학서적으로 가득했고 사상을 선전하고 혁명을 선동하는 책자에 탐닉하는 대학생이 적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라 가방에 넣고 다니다 검문에 걸릴까 가슴이 두근대기도 했다. 시위에 나섰다 경찰에 연행되기라도 하면 운동권 동료들은 재빨리 연행된 친구의 집에 가서 방을 정리했다. 혹시 경찰이 불온서적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할까 싶어 문제가 될 만한 책을 모두 치우는 것이다. 나도 한번 연행된 적이 있는데 친구들이 찾아와 책을 치웠고 경찰서에서 돌아왔을 때 그 책들은 모조리 재가 되어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염려한 할머니가 뒷산에 가져가 그 많은 책을 태워버린 것이다. 왜 태웠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느꼈을 붉은색에 대한 공포는 능히 짐작할 만했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책이 아닌데 그때는 사는 것만으로 스릴이 있었고 읽는 것이 일종의 저항처럼 보였다.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이 문체나 내용의 재미를 앞질렀다고 할까. 이런 사회과학서적 출판 붐은 민주주의의 확대와 더불어 사라졌다. 어학 코너만 붐비는 달라진 대학가 서점의 풍경은 좋은 시절이 왔다는 신호처럼 보였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하나둘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는 요즈음이다. 살수차, 명박산성, 백골단과 더불어 그 상징이 된 것이 불온서적 리스트다. 국방부가 선정했다는 23권의 책. 지금도 인터넷 서점마다 특별코너로 전시할 만큼 대단한 인기다. 나도 덕분에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읽었다. 신자유주의의 실체를 보여주는 이 책이 볼온서적이 된 걸 보면서 정부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웃기는 데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는 걸 실감했다. 이래서 예로부터 군인정신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던가. 내친김에 국방부의 불온서적 리스트에 못 들어가 반성했다는 우석훈의 <촌놈들의 제국주의> <직선들의 대한민국>까지 읽고나니 대학 시절 이후 처음으로 경제학에 흥미를 갖게 됐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덕에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이 굉장히 올라갔다는데 경제에 대한 관심도 그 못지않게 끌어올려주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잃어버린 10년에 사회과학서적이 잘 팔리는 시대가 포함된 줄은 미처 몰랐는데 말이다.
과거 불온하다고 금지됐던 음악과 국방부 선정목록에 낄 자격이 있는 책과 군인정신을 해치는 만화들을 모아 추석합본호 기획기사 하나를 만들었다. 연휴랄 것도 없는 추석이지만 책 읽고 음악 듣기 좋은 가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살펴보면 알겠지만 불온한 것만큼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좋은 것도 없다. 요즘처럼 세상이 어수선할 때는 확실히 불온하다는 평판을 얻은 책들이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P.S.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 우선 나쁜 소식은 지난주에 이어 필자의 사정으로 전영객잔을 한주 더 쉬게 됐다. 좋은 소식은 정훈이 만화를 다시 보게 됐다는 것이다. 다음호부터 연재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