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은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5월9일 영상자료원 내에 문을 연 한국영화박물관을 위한 영화인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하며 전시품 기증 캠페인을 벌입니다. 52번째는 김종원 영화평론가가 기증한 수도극장 기자출입증입니다.
1952년 평화신문사 우승규 기자에게 발급한 수도극장 출입증은 70년간 충무로에서 서울의 대중문화 흐름을 목도했던 스카라극장의 흥망성쇠와 수도극장의 사장이었던 홍찬의 안양촬영소 설립으로 축약되는 영화 기업화를 향한 열망을 떠오르게 한다. 20세기 초 서울의 극장은 서양의 근대 공연예술과 활동사진을 수용하며 도시 대중문화의 중심지이자 판소리, 재래 가무공연, 창극 등의 전통예술을 극장 안으로 끌어들여 그 맥을 잇게 한 공간이기도 했다. 해방 전 경성에는 19개의 극장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약초(若草)동보극장(또는 약초극장)이다. 1935년 약초극장은 ‘영화상설관’을 표방하며 비슷한 시기에 개관한 명동의 명치좌와 함께 단성사, 조선극장 등 종로통 중심의 흥행판도를 바꾸어놓았다. 1935년은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의 해이기도 하다. <춘향전>은 대사 전달은 미흡했지만 ‘다다미 소리’와 ‘문 여닫는 소리’로 관객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토키영화 제작 붐은 전문촬영소와 새로운 영화기자재 도입 등 영화자본과 시스템을 요구했지만 이러한 기반이 부족했던 조선영화계는 위축되었고, 1941년 ‘조선영화령’ 발효 이후로는 전적으로 일제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해방 뒤 약초극장 지배인이던 홍찬이 극장을 인수해 수도극장으로 개칭·재개관했다. 영화상영과 더불어 쇼와 연극을 공연했고, 1956년 <자유부인>을 개봉해 10만8천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영화계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평화신문사와 수도영화사 사장이기도 했던 홍찬은 1956년 자유당 정권의 특혜를 받으며 동양 최대 규모의 안양촬영소 건설에 착수해 최신 기자재와 3개의 스튜디오를 갖추고 최초의 시네마스코프영화 <생명>을 제작했다. 이 영화의 실패로 안양촬영소는 문을 닫았지만 이후 신필름이 시설을 인수하면서 6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일구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1962년 김근창이 수도극장을 인수하여 스카라극장으로 개명하고 70mm 영사기를 설치해 90년대 초까지 서울의 대표적인 극장으로 명맥을 유지했으나 이후 멀티플렉스 극장 시스템 재편 등의 변화를 겪으며 시사회 전용관으로 퇴락했다가 2005년 등록문화재 지정이 예고되자 극장주에 의해 철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