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지만 전 정우성과 장동건의 필모그래피를 구별하는 데 늘 애를 먹습니다. 장동건의 경우는 이름도 종종 잊어버리는데, 여기서부터는 기억할 수 없는 트라우마에 의한 일종의 장애가 아닌가 싶습니다. 굉장히 불편해요. 경력이 그 정도 되는 대표급 배우들을 제대로 구별 못하는 것은.
그러나 이건 저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장동건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건 심했지만 두 사람을 헛갈려 하는 사람들은 꽤 많이 봤단 말이죠. 그래서 여기에 뭔가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외모 때문일까? 둘 다 허우대 멀쩡한 장신의 미남 배우죠. 하지만 전 둘이 그렇게 닮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배우로서의 이미지도 다르죠. 장동건은 부리부리하고 야무지며 목표지향적입니다. 하지만 정우성은 헐렁하고 편안하고 누구 말마따나 좀 빈티가 나죠.
아마 답은 이미 제가 제시한 것 같습니다. 허우대 멀쩡한 장신의 미남이고 주로 남성성이 강한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라는 것 말이죠. 재미없긴 해도 세상의 모든 해답들이 머리를 꽝 칠 정도로 근사하란 법은 없는 거죠.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보다 정우성과 장동건을 훨씬 잘 구별할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히 마무리하기 전에 더 나은 답이 떠올랐습니다. 정우성의 경우 쉽게 수동적이고 종속적이 될 수 있는 이미지라는 거죠. 그런 이미지의 배우가 어쩌다보니 한 나라를 대표하는 미남 배우가 되다보니 다른 ‘한 나라를 대표하는 미남 배우’의 이미지에 종속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다른 배우가 늘 자신의 존재감과 배우로서의 능력을 입증하려고 눈에 불을 켠 노력파기 때문에 다른 한쪽이 더 쉽게 쓸려가는 것이죠. 저한테만 먹히는 답일지는 몰라도 꽤 그럴싸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이런 이미지가 단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정우성의 거의 무심한 듯한 편안함이 먹히는 영화들은 많죠. <데이지>나 <본 투 킬> 같은 똥폼 승부 영화들을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똥폼만 따진다면 그 근처라고 해도 <무사> 같은 영화에서 정우성의 존재감은 아주 적절하게 조율되어 있습니다. 액션을 할 때는 굉장히 멋있어 보이지만 자의식 과잉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죠. 이 친구는 그냥 싸워서 이기기 위해 행동하는 것뿐이고 멋은 그냥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것입니다. 이런 건 <내 머리 속의 지우개> 같은 멜로드라마에서도 잘 먹힙니다. 이 영화에서 정우성의 역할은 굉장히 아슬아슬할 수 있습니다. 내용만 보면 사장 딸을 유혹하는 직원 이야기이니 조금만 실수해도 믿음이 뚝 떨어지지요. 하지만 정우성에겐 계급 상승의 욕망을 숨기고 있는 남자가 가질 수 있는 그 불안한 느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가 연기한 철수는 그냥 편안해요. 가방줄은 짧지만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잘 알고 능숙하며 자신감이 충만한 블루칼라 출신 젊은이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지요. 덕택에 관객은 별 걱정없이 그의 로맨스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그의 편안함에는 설득력이 있어요.
그러나 이런 편안함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야기를 해보죠. 이 영화에서도 정우성은 이전처럼 무리없이 편안하게 주어진 역을 연기하고 있는데, 이병헌과 송강호가 거의 고함을 질러대는 것처럼 자기 역할과 개성을 수호하고 있는 와중에서는 아무래도 손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윈체스터 소총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질주하는 정우성의 모습은 쉽게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연기한 캐릭터 도원이 어떤 인물인지 떠올리기는 쉽지 않죠? 물론 이건 각본을 쓰고 연출한 김지운의 탓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고 아마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전 자꾸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정우성이 아닌 다른 스타였다면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수호했을 거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