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관객은 신났다. 7월에는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와 넥스트플러스 영화축제, 그리고 갖가지 기획전이 열렸고, 8월에는 정동진독립영화제를 시작으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시네마디지털서울 2008이, 9월 초에는 충무로국제영화제와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가 관객 맞이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영화제 카탈로그를 펴놓고 즐거운 시름을 토할 관객의 편의를 위해 <씨네21>이 ‘극장에서 여름나기’ 특집 기사(662호)를 따로 마련한 것도 그 때문이다. 1년 365일, 전국 팔도에서 영화제가 안 열리는 날이 없다는 말은 괜한 농담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이다. 관객으로서는 영화제의 천국을 마다할 리 없다. 취향대로, 맛난 것만 골라 먹을 수 있으니 딱 그만이다.
하지만 입장 바꿔 영화제를 치르는 이들로서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고, 경쟁이 아니라 전쟁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서로 윈-윈 하는 경쟁이라면 누가 말리겠는가. 하지만 그게 아니다. 일정이 겹치는 것은 물론이고 프로그램을 들여오기 위해서도 출혈을 마다하지 않는다. 일정한 성과를 얻지 못한 영화제가 도태되는 경우가 있지만, 그 이상의 신생 영화제가 이듬해에 생겨난다. 예산 낭비라며 영화제의 난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지는 이미 꽤 됐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관객이 영화제의 천국에서 아름다운 시간표를 작성하는 동안 각 영화제 관계자들은 지옥의 레이스를 각오해야 한다. 여기서 질문 하나. 식단을 차리는 이들이나 메뉴를 고르는 이들이나 모두 행복할 순 없을까.
국내에서 열리는 영화제만도 100개가 넘어
먼저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와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를 보자. 5회 행사를 맞는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는 9월4일부터 10일까지 열린다. 2회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는 9월3일부터 11일까지다. 영화제 일정이 겹친다. 게다가 상영관마저도 서울 명동 중앙시네마 안에 살림을 차린 인디스페이스와 스폰지다. 각 영화제 관계자들은 영화제 성격이 다르고, 프로그램이 다르니 “별 문제 없다”고 하지만, 시기와 장소가 겹치는데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두 영화제 모두 관객에게 아직은 정체성을 뚜렷하게 각인하지 못한 소규모, 신생 영화제임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8월과 9월은 ‘영화제의 휴식기’였다. 그러나 올해부터 이러한 양상이 바뀌었다. 영화제가 늦여름과 초가을에 홍수처럼 밀려들고 있다. 시네마디지털서울의 윤윤상 홍보팀장은 “신생 영화제는 기존 영화제의 대략적인 일정을 펼쳐놓은 다음 그들이 일반적으로 행사를 치르는 시기를 피해서 행사 시기를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예산 확보와 영화제 운영 시스템을 갖춘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 이른바 ‘빅3 영화제’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고, 굳이 같은 시기에 쳔다고 해도 ‘영화제 관객’을 분산하는 ‘공공의 적’밖에 되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빅3가 포진한 5월, 7월, 10월을 피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현재 영화진흥위원회에 등록한 영화제만 해도 무려 40개 안팎이고, “몇몇 극장과 단체들이 모여 만든 작은 영화제까지 합하면” 국내에서 열리는 영화제는 100개를 넘어선다. 굵직한 영화제를 빼면, 영화제가 열리는 개최 시기 등과 같은 기본적인 정보조차 사전에 알 수 있는 통로가 전무하다. 충무로국제영화제 정범 사무국장은 “이런저런 행사를 모두 피하다 보면 영화제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비슷한 시기에 영화제를 여는 건 부담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프로그램을 둘러싼 갈등도 적지 않다. A영화제는 해외 한 감독과 작품 상영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끝냈으나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B영화제에서 뒤늦게 감독과 프로듀서를 초청한다는 조건을 내걸어 결국 상영작을 내줘야 하는 상황이 됐다. 워낙 비일비재한 갈등이라 왈가왈부하기 뭐하지만, 공들인 상영작을 뺏긴 영화제쪽으로서는 행사를 앞두고 서둘러 대체작을 마련해야 하는 터라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뿐인가. 국고, 지자체의 도움만으로 영화제를 치를 순 없는 일. 당연히 스폰서 확보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데,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영화제간 경쟁이 치열할수록 전주 찾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 때문에 국내 영화제의 행사 일정과 애로 사항을 관장하는 협의체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예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영화계 안팎의 요구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는 2005년 겨울 영화제 관계자들이 함께하는 테이블을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논의는 없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관계자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행사 일정이나 프로그램상의 논의는 빠졌다”. 또 다른 영화제 관계자는 “규모 있는 국제영화제 관계자들이 관련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데 사실상 자신들과 큰 관련이 없다면서 뒤로 물러서 있다”고 덧붙인다.
영화제 실무자들의 공식적인 협의체 마련 필요
꼬인 실타래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도태와 방관만이 유일한 해결방안일까. 현재로선 영화제 실무 관계자들 중심으로 기동성있는 협의체를 꾸린 뒤 해결 가능한 사안부터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와 충무로국제영화제는 행사 일정과 상영관이 겹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고, 이미 그때는 변경이 아예 불가능한 국면이었다. 시네마디지털서울의 김수정 사무국장은 “우리와 충무로영화제는 하루 간격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각자의 행사를 더 많이 알리기 위해서라도 이는 적절치 않았다”면서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영화제들은 사소한 것부터 조율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규모가 큰 영화제라고 해서 어려움이 없는 건 아니다. 영화제는 많지만 영화제 인력은 여전히 부족하고 스폰서 구하느라 정작 운영방안 개선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할 때가 많다.” 한 국제영화제 관계자의 말이다. 그는 영화제 실무자들의 협의체 마련에 동의하면서 “작은 부분에서부터 먼저 바꿔내지 못하면 자립적인 예산 확보, 데이터베이스 관리, 영화제 인력 재교육과 노하우 축적 등과 같은 복잡한 사안들의 해결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과유불급이 아니라 다다익선으로 가려면, 백지장도 맞들고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곱씹는 것이 우선이라는 뜻이다. 정부도 국제영화제 채점에만 매달리지 말고, '페스티벌 프렌들리'를 위해 공론의 장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야 하지 않을까.
“비공식적인 모임은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안미라 사무국장 인터뷰
-영화제간의 교류가 있나.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나. =공식적인 협의체는 없지만, 몇몇 영화제 사무국장들이 모이는 비공식적인 모임은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서울에서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등 아홉개 영화제의 사무국장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모두 국가의 지원을 받는 영화제들이고, 지금까지 네번 정도 만났다.
-어떻게 모이게 됐나. =일단 서로 알고 지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제 개막식마다 매번 가는데, 다른 영화제 사무국장이 누군지 모르니 서로 인사도 못하게 되더라. 또 영화제들이 풀어야 할 숙제들도 함께 고민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제들이 함께 풀어야 할 숙제란 무엇인가. =먼저 영화제 조직 관리가 잘 안 되고 있다. 매년 영화제를 치를 때마다 똑같은 인력난을 겪고 스탭도 자주 바뀌다 보니 노하우가 쌓이지 못한다. 두 번째는 전산시스템 문제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내부 스탭만 2백명이고, 자원활동가는 8백명 정도 된다고 들었다. 영화제의 규모가 점점 커져 이제 인적·물적 자원을 데이타베이스로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온 거다.
-지금까지의 모임은 어땠나. =이야기만 늘어놓고 결론이 없으면 안 되니 뭔가 한 가지씩 실천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모임이 열릴 때마다 다양한 특강을 시도하고 있다. 4월 모임에서는 부산영화제 인터넷 팀장을 초청해서 전산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다음엔 티켓팅 시스템 교육을 받을 예정이다. 이런 방식으로 정보나 노하우 공유를 시도하고 있다.
-모임의 범위를 넓힐 생각은 없나. =물론 있다. 우리끼리도 규모가 작은 영화제들이 모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자는 얘기를 했다. 우리도 아직은 알아가는 단계지만, 공식적인 협의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시점이 오면 그때 다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