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 한심하다. 기껏해야 아동극에 당나귀 정도로 출연하며 입에 풀칠하는 삼류배우. <남편과 남성들의 상식>이라는 책을 성경처럼 탐독하며, 방 안에 구겨져 포르노 잡지나 뒤적이는 칼 뮐러. 하지만 그에게도 인생 역전의 순간이 찾아온다. 수전노로 유명한 갑부가 여배우와 한번 뒹굴어보겠다는 생각으로 TV미니시리즈를 제작하고, 오로지 예산을 줄일 속셈으로 가장 싼 배우인 그를 캐스팅한 것. 온갖 해프닝을 벌이며 촬영한 첫회가 방영된 뒤, 고명한 비평가가 그의 연기를 극찬하고 나서고 칼 뮐러는 하룻밤 사이 초대형 스타가 되어버린다. <행운아54>는 풍자소설 <개를 위한 스테이크>와 예술비평서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로 이미 국내에 소개됐던 이스라엘 작가 에프라임 키숀의 작품으로, 그가 눈을 감기 두해 전인 2003년에 발표한 유작이다. 일상의 고만고만한 파편들을 그러모아 기막힌 유머로 버무리는 키숀 특유의 감각은 이번 작품에서도 빛을 발한다. 미디어산업과 비평계, 대중심리에 대한 풍자가 신랄하지만, 굳이 행간의 의미를 따져볼 새 없이 마냥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작품이다. 유머감각이란 나이를 먹으면서 더욱 여무는 것일까. 여든의 나이에 펜을 굴리며 슬며시 웃음 지었을 노작가의 얼굴을 저절로 상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