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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흥미로운 놈들을 만나다

액션을 위한 액션이 아니었더라면 좋았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1. 흥미로운 놈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은 흥미로운 놈이다. 대단히 야심적이지만 야심이 불분명하기도 하다. 위의 세놈을 맡은 세명의 배우, 송강호(태구), 이병헌(창이), 정우성(도원)은 분명 최선을 다한다. 로케이션 장소인 둔황의 모래 사구를 뒤흔드는 말발굽, 자동차, 총탄이 천둥치는 소리는 만주 웨스턴과 스파게티 웨스턴의 다이내믹한 융합을 조준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코 재미없는 영화는 아니다. 정우성의 말타기와 후진, 그리고 총 돌리기는 웨스턴 코드들을 습득한 뒤 그것을 가볍게 수행해내는 장르 배우의 근사한 도착을 알려준다.

영화는 보물 ‘지도’라는 고전적 약속으로부터 시작한다. 비적들은 비적들대로 놈들은 놈들대로, 일본군은 일본군대로 보물 지도 쟁취에 나선다. 이윽고 예의 ‘보물 지도’가 예지해준 장소로 도착하기 전, 영화는 대격전을 맞는다. 우선 태구가 오토바이를 타고 필사적으로 둔황의 사막을 달린다. 나머지 다양한 그룹들이 그 뒤를 따른다. 창이의 무리, 다국적 비적의 무리, 그리고 병참기지 자체를 운송하는 듯,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만주군 연합(관동군?). 이들을 관찰하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재등장하는 도원. 모두 태구의 지도를 노리며 그를 추격하는 것이다.

김지운 감독은 이 난감한 상황을 묘기있게 연출해낸다. 비적들과 일본군, 만주군 연합군이 어느새 스크린으로부터 떨어져나가고(흠, 불가능해 보였는데), 세놈만 보물 지도가 가리키는 곳에 모이게 된다. 이후로 물론 보물은 있는 둥 마는 둥 다시 플롯에서 없어지고 세놈의 쇼 다운이 시작된다.

수정주의 웨스턴으로서의 <놈놈놈>은 사실 만주 웨스턴과 스파게티 웨스턴도 참조하지만, 서극의 수정주의 무협극 <칠검>의 펑크적 태도, 현실주의적 태도 등을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즉 고전 무협의 당파나 이념에 이끌리는 싸움이 아니라 금전적 보상에 의해 추동화되는 강호 고수들의 맞대결 말이다. 수정주의 웨스턴과 퓨전 무협, 그리고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로망 등이 각 시퀀스들을 야심차게 넘나든다. 슈퍼, 하이퍼 장르영화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이러한 야심들 때문에 좀더 뼈아픈 핵심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이퍼 장르영화가 가질 수 있는 그 장르의 환골탈태로 향하는 미적, 정치적 성격 말이다. 도착과 전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텍스트가 시리즈화, 그리고 장르화되면서 축적해가는 사회적 열망의 집합으로서의 유토피아와 욕망의 파국으로서의 디스토피아적 사이의 긴장을 배태시키기도 하고 사산시키기도 하는 탈장르적 장르 충동. 특히나 수정주의 웨스턴은 그러한 긴장과 충동을 흡혈하며 성장하는 법이다.

2. 이상한 웨스턴들-커리, 스키야키

카우보이 역을 도맡아 하는 브롱코 빌리 앤더슨이 등장했던 1903년 에드윈 포터가 만든 첫 번째 웨스턴 <대열차 강도> 이후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 등의 황금기를 거쳐 1960년대와 70년대 스파게티 웨스턴, 이탈리안 웨스턴 이후 웨스턴은 급속하게 탈할리우드와 탈서구화한다. 인도의 힌디영화 중 가장 히트작인 1975년의 <숄레이>는 커리 웨스턴이라고 불린다. 방글라데시에서는 바로 이 <숄레이>를 모방하고 패러디해 <도스트-두쉬만, 1977>이라는 웨스턴을 만든다. 필리핀도 타갈로그어로 제작된 웨스턴을 만들었는데 예를 들자면 <버치 캐시디와 선댄스>는 타갈로그어 버전에서는 <오마르 캐시디와 산달리아스>로 변모한다. 또 동구권이나 소비에트에서는 할리우드의 웨스턴에 대항해 미국 인디언들을 착취당하는 자들로 묘사한 “오스테른” 장르를 띄웠다. 유고슬라비아인이나 터키인들이 인디언으로 출연하곤 했다. 얼마 전, 미이케 다카시가 만들었던 엉망진창 영화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는 사실 그전부터 있었던 일본의 웨스턴 장르와 연속선상에 있다.

3. 만주 웨스턴

이렇게 보자면 웨스턴이 할리우드의 전속 장르가 아님은 분명하고 동유럽의 웨스턴이 오스테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인도에서 방글라데시, 필리핀 그리고 일본 등에서 만들어지는 웨스턴들은 아시아 웨스턴이라고 할 만한다.

대륙활극, 만주 웨스턴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은 정창화 감독의 <지평선>(1961)을 비롯해 김묵 감독의 <소만국경>(1964), <광야의 호랑이>(1965), 그리고 이용호 감독의 <불붙는 대륙>(1965), 그리고 신상옥의 <무숙자> 등이 있고 임권택 감독의 <황야의 독수리>(1969), 이만희 감독의 <쇠사슬을 끊어라>(1971)가 있다. 당시 대부분의 만주 웨스턴들이 만주 독립군들의 고난과 무용담을 60, 70년대 군사독재정권에 순응하는 애국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있다면 <황야의 독수리>와 <쇠사슬을 끊어라>는 단연코 그러한 성향을 끊어버린다. <황야의 독수리>에서 가족을 잃은 장동휘는 배회하다 독립군을 만나지만 그것은 별 의미없는 사건으로 지나가고 개인의 통절한 사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쇠사슬을 끊어라>의 장동휘, 허장강, 남궁원 삼인조가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the Ugly, 1966)와 더불어 <놈놈놈> 삼인조의 인물 설정에 좀더 분명한 향방을 제공한 것으로 이야기되는데, <쇠사슬을 끊어라>에서 삼인조는 독립군으로 남아달라는 요청을 뿌리치고 호방하고 명랑하게 (허문영 표현) 석양으로 사라진다. 이때의 부정은 영화 서사상에서 역사적 개연성을 거의 갖고 있지 않은 일제 강점기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1970년대 당대 민족국가에 대한 불복이다. 무정부주의적 항의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1960년대와 1970년대 만들어진 대륙활극, 만주 웨스턴 중 몇편은 일제강점기 1930년대, 그리고 1940년대 초반 시기를 휘어진 거울처럼 비추면서, 경제개발 시기의 그 시대적 휘도를 담빡 낮춘 뒤, 그 암흑이 일종의 ‘역사적 쌍’으로 존재함을 일러주고 있다. 예컨대 역사적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기가 영화에서 역사적 쌍으로 만나게 되고 일제강점기는 역사적 패착으로, 악수로 60, 70년대 대중문화, 대중영화에 무의식으로 기어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황야의 독수리>는 정체성을 오인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어 상대를 끝장내야 하는 도착적 일본인 군인의 각본 속에서 비극으로 끝나고, 반면 <쇠사슬을 끊어라>는 불가능한 명랑함 속에서 이 무정부주의적 단절을 만들어낸다. 좌파적 상상력이라기보다는 도발적 부정인 셈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개발 드라이브 입안이 메이지 유신과 만주산업 5개년 개발 계획 등에 근간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 패착 지점으로 만주를, 영화를 통해 가리키게 되는 것은 흥미로운 정치적 무의식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만주 웨스턴은 당시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냉전상황 속에서 남한에 유폐되어 있다고 느끼던 당시 관객에게 유토피아적 ‘어딘가 다른 곳’에 대한 지정학적 판타지를 펼칠 수 있는 유사 대륙 공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냉전 때문에 만주지역(현재 중국 동북지역)에 가서 촬영하거나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이런 이유로 호금전도 <산중전기>를 남한에 와서 찍었다), 남한이 아닌 대륙 어딘가로 설정된 광활한 평원에서의 로케이션은 그러한 지정학적 판타지를 가능하게 하는 가늠쇠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제 다시 <놈놈놈>으로 돌아가보자. 이 영화의 관심은 물론 역사적 짝짓기를 통해, 동시대 문제의 패착 지점을 포착해내는 데 있지 않다. 30년대가 소환되는 방식은 동시대의 거울이나 미장아빔과 거의 관계가 없다. 이 영화가 흔쾌히 관계를 밝히는 부분은 어떤 영화에서 다른 영화로 횡단한다는 인용적 관계다. 나는 이것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만주 웨스턴이 눌변과 달변을 섞어 다루었던 역사적 짝짓기 기획을 폐기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환치하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점을 물어보고 싶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정치적 색조 내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륙 아닌 반도, 조선 독립 가능성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부정이다. 좋은 놈 도원이 독립군의 부탁을 받고 지도를 찾아 헤매지만, 그것은 이념적 지지라기보다는 두둑한 보상금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좋다는 의미는 부탁을 받은 것을 이행한다는 것이지, 대의를 위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 말미, 일본군과 만주군 연합군을 민첩하게 총격함으로써 대중적 코드인 민족주의적 감성을 채워주는 것은 역시 도원이다. 반면 나쁜 놈 창이는 자신의 고용주를 죽이고, 자신의 부하를 죽이고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사람을 난자함으로써 비극적 악인이라기보다는 성질 나쁜 악인쯤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병헌의 집중된 연기와 사이버펑크 스타일 의상으로 악인의 아우라는 낭자하지만, 나중에 그가 ‘허무’를 이야기할 때 영화 자체가 좀 허무하게 느껴지게 된다. 대중장르영화로서의 선명성 혹은 단순화 때문인지 좋고 나쁜 이항 대립을 절로 와해해버리는 이상한 놈이라는 제3항, 삼자의 등장이 이 영화에 끼치는 영향은 의외로 많지 않다. 이상한 놈이라기보다는 웃기는 놈 역할을 할 때가 더 많다. 그래서 웃긴 웃지만, 이상하게 웃게 된다.

인물 유형 문제는 이쯤 해두고, 나는 이 영화가 비교적 잘 안무된 액션장면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마치 무엇을 위장이라도 하는 듯 사용하고 있는 각이 들어맞는 몽타주 편집의 기교와 마치 B급 이탈리아 공포영화라도 되는 듯 과도한 사운드를 토해내는 것이 이상하다. 관객의 반응을 유도하는 속임수가 은근히 많다는 뜻이다. 예컨대 처음 기차 습격장면에서 다중 인물과 그룹들이 얽혀드는 데서도 공간적 오케스트레이션보다는 편집을 통해 긴장감이나 놀람을 유도하고 있고 사운드의 데시벨을 올려 역시 그 효과를 내고 있다.

후반으로 갈수록 상황은 좀 나아지지만 웨스턴은 근본적으로 공간의 존재론과 지리적 정치성의 환기를 통해 그 장르를 구축해온 만큼 그것을 해체한다고 해도 어떤 구성적 이해를 해체하고 있는지에 대해 재-인식론적 지도가 필요할 것 같다.

두 번째, 판타지에 대한 부분이다. 이 영화에서 1930년대쯤의 만주는 법도 질서도 없는 공간으로 상상되고(영화 후반 일본군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렇고 등장하고 나서도 큰 영향력이 없다) 그리고 국사 교과서에서도 독립군의 활동 무대 정도로 소개되지만, 인도계 미국 학자로 중국학 학자인 프라센짓 두아라는 동아시아의 근대, 제국의 형태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사례로 만주를 보고 있다.

30년대의 만주는 1931년 9·18사변, 그리고 32년 관동군의 만주국 수립 뒤, 오족협화(일본, 만주족, 한족, 조선족, 몽골족), 왕도낙토건설 등을 내세웠다. 그중 하얼빈에는 폴란드계 유대인, 러시아계 등이 이주했다. 협화는 아닐지언정 오족 이상의 민족들이 다민족문화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60년대 <소만국경>이나 <불타는 대륙> <사르빈 강에 노을진다> 등에서 다른 민족 집단들이 시사되고 있는 점이다. 당시 국사 교과서나 정부는 만주를 이렇게 복합적인 정치 공간으로 다루지 않았지만, 가족사나 구전을 통해 사람들이 알고 있던 만주 이야기들이 대중영화 스크린으로 출현했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 초반부 등장하는 1906년 설립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는 만주 근대화 계획의 주요 동력이었다.

물론 이 영화는 만주를 위와 같은 방식으로 불러내는 데 관심을 두고 있는 게 아니고 오족들의 이전투구에 총력전을 치르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설명이나 분석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왜 위와 같이 풍부한 역사적 공간으로서 만주를 생각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제목이나 의상 코드, 인물의 설정들은 스파게티 웨스턴이나 만주 웨스턴 그리고 퓨전 무협류를 따르고 있지만, 이 영화는 한판 크게 잘 벌여보자는 블록버스터로서의 욕망은 있되, 정치적 미학적 야심이 누락되거나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 환치되는 과정에서 그 응축성을 놓쳐버린 것 같다. 안타까운 점은 이 영화가 뿜어내는 사막 위를 달리는 원시적 광기는 있으나, 인물들과 사건이 엮여들면서 그 광기와 악을 역사와 당대라는 복잡계로 치환시킬 사유나 미학적 고민은 빈곤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나쁜 놈’이 불러일으키는 경악감이 친일시로 논란을 빚고 있는 유치환의 시 <>(首)의 비적(독립군으로 해석되기도 함)의 참수된 머리 수위 정도로 올라야 당대적 재해석의 묘가 살아날 것 같다.

“십이월의 북만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 네거리에 비적 머리 두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에 모호히 저물은 삭북의 산하를 바라고 있도다. 너희 죽어 율의 처단이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이 아니라 질서를 보존하려면 인명도 계구와 같을 수 있도다. ….”

그러나 이제까지 대다수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의 난감한 플롯, 부실한 세트장 등의 사례를 볼 때 한국형 웨스턴으로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숙련도는 상당한 진전을 이룬 편이다. 하지만 액션을 위한 액션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숙련되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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