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볕더위와 함께 휴가철이 돌아왔다. 만나는 사람마다 휴가는 언제 가냐는 인사를 던지게 되고 평소에 거들떠보지 않던 환율에 눈길이 오래 머무는 계절이다. <씨네21> 기자들도 기사 쓰는 틈틈이 휴가 계획을 짜느라 웹서핑이 한창이다(눈길을 피해도 그러고 있는 거 편집장은 보고 있다). 고유가와 고환율로 예년에 비해 해외여행을 계획하기 쉽지 않지만 1년에 한번 휴가를 어영부영 보내고픈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억에 남을 휴가 계획을 생각하다보니 독자 여러분도 우리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씨네21>이 제안하는 여름나기 프로젝트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에 7, 8월 각종 영화제와 공연, 전시 프로그램을 망라했다.
영화제에 가면 인터뷰하고 기사를 쓰느라 온전히 영화를 즐길 수 없는 게 영화기자의 비애인지라 기사를 쓴다는 부담없이 영화제에 가면 정말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된다. 4년 전에 그런 기회가 있었다. 휴가를 내고 4일간 시네마테크 부산에 가서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을 봤다. 혹시 누가 알면 갔다와서 기사로 쓰라고 할까봐 몰래 책 몇권 챙겨들고 부산행 기차에 올라탔다. 10년 넘게 부산영화제 취재차 다녀간 길이지만 마음의 여유를 갖고 해운대 일대를 돌아본 것도 처음이었고 글 쓰는 부담없이 매일 3~4편씩 영화를 본 것도 처음이었다. 오즈의 영화여서 그랬는지, 극장에 사람이 너무 없어서 그랬는지, 눈앞에 바다가 펼쳐져서 그랬는지, 그 며칠 동안 시간은 한없이 다정한 것 같았다. 씹으면 달콤한 맛이 났고, 잡으면 보드랍게 품에 들어왔으며, 귀를 기울이면 맑고 투명한 소리를 들려줬다. 아침엔 해변을 걷고 틈이 날 땐 바다가 보이는 해운대 어린이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었고 극장에선 혼기를 맞은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를 만났다. 그러면서 오즈의 영화적 비밀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대신 오즈가 제시한 영화적 상황에 나를 대입하며 살면서 부딪칠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갑자기 삶의 비밀을 깨닫거나 영화적 각성을 한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것은 다음 일정에 쫓기는 여행에서 맛볼 수 없는 영혼의 안식을 가져다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게 절실히 필요했던 걸 해서 얻은 만족감이었으리라.
올해 시네마테크 부산의 8월 프로그램을 보니 에른스트 루비치와 더글러스 서크의 회고전이다. 여름이라 해변은 북적대겠지만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제천국제음악영화제나 정동진독립영화제도 근사해 보이고 서울에서 열리는 영화제 가운데도 알찬 것이 많다. 표 구하느라 난리법석을 부려야 하는 상황만 아니라면 여러 영화제 가운데 하나를 골라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것도 여름을 나는 괜찮은 방법일 것이다. 끓어오르는 혈기를 감당 못하는 분이라면 록페스티벌도 좋고 차분한 감상을 원한다면 전시회도 좋다. 선택은 아마도 우리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 부족한 것이 충분한 수면이었는지, 마감 시간에 쫓기지 않는 정신적 여유였는지, 영화광 시절의 열정이었는지, 억눌린 스트레스를 폭발시킬 기회였는지, 문화적 감성을 자극하는 자극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볼 때 같다. 무엇을 하든 평소 못했던 걸 해보는 즐거운 휴가 맞으시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