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우리 배우들 고생한 거 이제야 알겠습니다.” 7월11일 <궤도> 개봉을 앞두고 서울을 찾은 재중동포 김광호 감독. 찍는 건 능숙하지만 찍히는 건 고역이라며 사진기자가 셔터를 몇 차례 누르지도 않았는데 손사래친다. “여름이지만 선선하다”는 고영재 프로듀서의 말만 믿고 긴팔 와이셔츠만 챙겨왔다는 그는 서울의 뙤약볕 아래서 얼굴을 찡그리는 순간 카메라 앞에서 촬영 때마다 고문당했을 배우들이 먼저 떠올랐다고 덧붙인다. <궤도>는 대사없이 “인물들의 시점숏으로만” 이뤄진 독특한 형식의 영화. 손이 없어 상대를 쓰다듬지 못하는 남자와 말을 못해서 상대를 부르지 못하는 여자는 끝내 합치되지 않는 평행의 철길 궤도 위에서 눈으로 말하고 눈으로 만진다. 23명의 옌볜 조선인 스탭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궤도>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을 받았고, 올해 로테르담, 에든버러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며 호평받았다. “옌볜에는 쓸 만한 극장이 하나밖에 없어서” 현지 개봉은 어려울 것 같다면서도 그는 “영화진흥위원회, 부산국제영화제, 인디스페이스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궤도>의 한국 개봉이 열악한 환경의 옌볜 영화인들에게는 힘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했다.
-<궤도> 전에 철수 역을 맡은 배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주인공 맡은 배우 이름이 최금호예요. 알다시피 양팔이 없어요. 2002년에 보도된 신문을 보고 알았어요. 팔이 없는데 어떻게 살아가느냐, 궁금증이 많잖아요. 시청자도 궁금해할 것 같고. 그래서 직접 찾아가봤어요. 그 친구가 사는 곳이 옌지에서 한 60km 떨어진 외진 곳인데, 처음에 만나서 밥을 같이 먹는데 발이 밥상 위로 쏙쏙 올라와요. 아, 이거 참. 그때만 해도 이거 좋은 소재구나 그랬어요. 이 친구를 다큐멘터리로 찍으면 시청률도 무조건 뛸 것이다 그런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하루, 한달, 1년 가까이 촬영했어요. <금호의 삶의 이야기>라고 나중에 이름 붙여서 옌볜에서 방영이 됐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위성으로도 보여졌고. 그 이후에 돕고 싶다는 시청자의 문의가 방송사에 쏟아졌어요. 모금운동도 벌어졌을 정도예요.
-최금호씨와는 쉽게 친해졌나요. =한 1년 동안 같이 자고 먹고 했는데 처음에는 힘들었어요. 발로 오이를 뚝뚝 부러뜨리는 걸 보면서 솔직히 밥을 같이 먹는 것도 힘들었어요. (웃음) 시청률 생각하면서 어떤 일이든 참아낸다고 하고 들어갔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지요. 그런데 3개월 정도 지나니까 달라졌어요. 아, 내가 포장된 사람이구나 싶은 거예요. 언어로 나를 포장해온 사람이구나. 내가 정상인이구나가 아니라 어느 시점부터 저 친구 사는 게 더 자연스럽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최금호씨와 가까워지게 된 계기가 있나요. <궤도>의 향숙은 빨래도 해주고 그러면서 조금씩 철수에게 호감을 내보이는데요. =내가 가면을 쓰고 접근을 해도 그 친구가 그걸 싫다고 않고 더 가까이 보여줘요. 내가 한 것이야 촬영 갈 때면 필수품 조금 가져다주는 수준이었어요. 그런데 받는 사람이 (그 마음을) 더 크게 받곤 했으니까. 지금도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데, 그 친구 공이 커요.
-친해졌다고 하지만 좀더 생생한 장면을 찍기 위해서 훔쳐봐야 하는 상황도 많았을 텐데요. =많이 훔쳐보려고 했어요. 근데 잘 안 됐어요. 그 친구가 정말 총명하거든요. 이런 막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제 호기심 중 하나가 저 친구가 변소에 어떻게 가느냐 이거였어요. 방송은 못하더라도 이게 너무 궁금한 거예요. 그래 내가 그 장면을 카메라로 꼭 잡고 말 것이다, 끝내는 못 잡았어요. 제가 그걸 노리고 있다는 걸 아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그냥 물어봤어요. 다 물어보면 기분 상할 것 같아서, 노크(지퍼)는 닫고 사느냐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그 친구 말이 노크를 닫지 않고 어떻게 사느냐, 그래요. (웃음) 사실 그런데 발 쓰는 것을 보면 뒤 닦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에요. 다큐멘터리에는 담았지만, 발로 라디오 수리까지 할 정도니까. 컴퓨터 치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궤도> 촬영 때 우리 손에 티가 박히면 그걸 발로 뽑아줄 정도였어요.
-<궤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언제였나요. 다큐멘터리로는 미진했던 건가요. =다큐멘터리야 시작부터가 이 친구의 삶을 어떻게 보여주겠다는 것보다 시청률 욕심이 좀 컸지요. (웃음) 극영화로 만들겠다고 작심한 건 2005년부터인데, 다큐멘터리 촬영하는 동안에도 그런 욕구는 있었어요. 우리가 장애인을 보는 눈길과 장애인이 우리를 보는 눈길이 달라요. 술 한잔 하고 형, 동생 하게 됐는데도 가끔 말을 하지 않을 때 어떤 눈빛이 있어요. 그게 도대체 뭐냐. 궁금한 거예요. 한 일주일 동안 촬영하고 나서 테이프 정리하러 떠나려고 하면 그 친구 눈빛이 굉장히 이상해요. 혼자 살아온 사람의 고독감인데, 처량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렬한 거예요. 편집을 하면서도 저도 그 눈빛이 정말 안 잊혀지고, 그래서 아 저 시선으로, 눈길로 말을 하는 영화를 만들어보자 그런 거예요.
-전반부까지만 하더라도 장률 감독의 영화와 비교하게 되던데요. 좀 거칠게 말하자면 <망종>의 그녀가 <경계>의 허가이를 만났다, 하는 식으로. =음, 그렇게 보이기도 하네. 확실히 그런 게 있어요. (웃음) 그렇다고 장률 감독의 영화를 내가 탐낸 건 아니에요. 내 영화에서는 애초에 최금호씨 때문에 모든 것이 정해졌어요. 그의 눈길이 철수와 상대 역을 만들었고, 그러면서 대사없이 가보자고 한 것이고. 시점숏으로 간 것이나 롱테이크가 많은 것도 그 인물들의 특성에서 나온 것이니까.
-철수는 향숙을 통해 엄마를 끊임없이 떠올리는데요. 엄마라는 존재는 최금호씨와 상관없이 새로 만들어넣은 설정인지요. =실제 어머니와 비슷해요. 장애를 겪었던 분은 아니고. 다만 말수가 없으셨고. 그 친구가 팔을 잃은 게 여덟살 때예요. 고압선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는데 전기를 맞아서 수술을 7차례나 했대요. 처음에는 이만큼 잘랐다가 계속 썩어들어가서 나중에는 팔을 다 뽑아야 하는 상황이 온 거지요. 그런데 사실 금호는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살지 못했을 거예요. 어렸을 때에는 큰형이 네가 살아서 어머니부터 우리까지 모두 고생이다라고 죽이려고까지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가 막아섰대요. 학교 다니면서 연필이 목구멍을 푹푹 찌르는데도 입으로 글을 썼던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자립할 수 있었던 게 어머니 때문이에요.
-조금 이른 질문일 수도 있고,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관객에게는 스포일러일 수 있어서 좀 그렇지만 영화의 끝부분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많을 것 같아요. 엄마에 대한 죄책감에서 더 나아가서 철수가 자신의 불완전한 존재를 사랑하는 대상에게 완전하게, 또는 끔찍하게 이식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거든요. 그녀 또한 죄책감으로 살면서 평생 그를 떠올릴 테니까요. =그 장면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그때마다 당신의 이해에 따라서 해석하라고 해요. 그냥 환각이라고 생각하면 좀더 편할 것 아니냐 그러기도 하고. 제 입장에서는 향숙이 엄마의 옷을 입고 다시 환생했을 때 철수의 해탈 방식은 그게 아닐까 싶었어요. 엄마에게 돌아가는 결론 말고는 다른 게 없지 않겠는가. 애초 촬영한 버전은 좀더 희망적인 게 있긴 했어요. 마당에서 향숙이 갓난아이의 바지를 걸어놓고, 그 바지 가랑이에 궤도라고 영화 제목을 박아넣으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좀 부차적인 것 같고.
-후반부에 머리 감다 말고 철수가 향숙을 등지고 한참 걸어가는 장면이 있는데요. 카메라는 향숙의 시점에서 멈춰서 있는데 발소리는 계속 똑같은 크기로 들립니다. 철길 위에서 철수가 향숙을 바라보는 장면과 대구를 이루고 있는 이 장면에서 향숙은 마음으로 철수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 것인가요. =향숙이 눈으로 들을 수 있게 됐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런데 누가 듣는가보다 중요하게 고려한 게 있었어요.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왔던 궤적 소리를 들으면서 동시에 나중에 걸어야 할 길까지 암시하는 장면이었으면 해서 원래는 컷으로 밀어버리려고 했는데 현장에서 그냥 내리 걸으라고 했어요. 철탑 아래로 향하는 철수가 하나의 점으로 사라지는 것과 하나로 모이는 것 같아도 언제나 평행선인 고압선의 느낌을 한데 담아서 이 사라짐과 저 사라짐을 동시에 보여주고 싶었어요. 개인적으로 세상의 모든 것은 동그라미라고 생각해요. 결국엔 원점으로 돌아가지만, 시작과 끝은 알 수 없어요. 철수 집 앞에 있는 커다란 고압선이나 철길의 이미지도 그래요. 멀리서 보면 점점 하나의 점으로 모이는데, 실제로는 붙지가 않잖아요. 그냥 평행을 달리고. 사람 인(人)자의 모양과도 비슷해요. 인간들의 관계도 그러하고. 저야 그런 이미지를 많이 넣으려고 했는데 공감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향숙 역의 장소연씨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요. 옌볜 배우라고 착각할 정도인데요. =2006년에 재외동포재단이랑 부산국제영화제의 도움으로 한국에 왔다가 장률 감독을 만나서 부탁을 했어요. “야, 한국서 배우를 좀 찾아야겠는데, 나 돈도 없다.” 옌볜에서 상점을 죄다 돌면서 마땅한 배우를 찾으려는데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게다가 제 눈에는 한국 사람들은 다 배우 같았어요. 영화에 대해서 다 한마디씩은 하니까. 장률 감독이 몽골에 가서 <경계> 촬영을 끝내고 돌아온 때였는데, 그가 자기 스탭들을 통해서 친분있는 배우들을 수소문해준 거예요. 한 네분 정도 오셨나. 근데 첫눈에 장소연이에요. 눈도 크고, 망울도 크고, 그리고 착하고 여린 듯하면서도 또 실은 강한 여자의 느낌이 있는 거예요. 아 최금호의 눈길하고 궁합이 맞겠구나 한 거지요. 그렇게 인사하고 나서 다음날 만났는데, 너무 고마웠어요. 내가 어떤 놈인지도 모르고, 또 그때는 시나리오도 안 줬어요. 운이라는 게 있나 봐요. 프로필을 보니까 중국어를 할 줄도 알고 중국어 수화도 조금 할 줄 안다는 거예요.
-시나리오는 없었다고 들었는데요. =아, 시나리오라고 부르기엔 뭣하지요. 제가 촬영을 전공해서 그림으로 그린 게 전부예요. 마흔아홉장 정도 됐나. 그 안에다가 철수가 간다. 뭐 이 정도 글이 붙어 있고. 대사가 없으니까 나중에 한국 개봉 때 심의용으로 고영재 프로듀서가 직접 3일 동안 시나리오를 썼어요. 시나리오를 맨 마지막에 쓴 셈이지요.
-한달 정도 촬영하는 동안 쉬지 않고 찍었다고 하던데, 배우들이 육체적으로도 굉장히 힘들어했겠네요. =너무 고생했죠. 나야 다큐멘터리 찍으면서 인물들의 동선까지 다 머릿속에 있으니까 수월했지만 배우나 스탭들은 그게 아니니까. 게다가 시점숏이 많으니까 배우들이 연기할 때 상대가 대부분 카메라 렌즈예요. 하나는 철수 집 세트를 실제 최금호씨가 사는 뒷산에 만들었는데 거기 산파리가 많아요. 게다가 촬영했던 5월이 산파리들의 산란기예요. 이놈들이 자꾸 습한 곳을 찾는데 그게 어디냐면 사람들 눈이에요. 사람 눈에 알을 치려고 마구 달려드는데. 영화는 슛 들어가면 롱테이크니까 배우들은 눈을 끔벅거릴 수도 없고, 소연씨도 고생했지만 금호씨는 팔이 없으니까 머리를 흔들어야 했고. 그런 장면 보면서 가슴이 계속 아팠어요. 아, 그리고 <망종>의 남자주인공인 주광현. 나의 친구인데 <궤도>에서는 미술로 참여했어요. 촬영 때 세계적인 배우인 자신한테 철길 두드리는 거 시킨다고 필름이 돌아가지 않으면 협조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고.
-그런데 전반부에 등장하는 아이는 철수의 상상인가요. =음, 안타까움이 많아요. 사실 애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 이야기를 미처 다 못했어요. 원래 아이는 철수의 어렸을 때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고압선 철탑에 오르려는 아이를 보고 철수가 쫓아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어제의 철수를 오늘의 철수가 뒤쫓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나중에 그 장면을 쓰지 못하게 됐어요.
-기술적인 문제 때문인가요. =<궤도>는 23명 스탭 전체가 조선족이에요. 이중에서 영화 교육을 정식으로 받은 사람은 저 혼자밖에 없어요. 그전까지는 조선족 감독의 영화라고 하더라도 다들 중국 한족 스탭들을 불러서 썼어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봤어요. 중국 스탭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문화적 차이가 있고, 또 제작 체계도 달라요. 그러니까 스산한 일들이 생겨도, 결국 우리 나름대로 어떻게든 만들어내야 한다. <궤도>가 만들어진 다음에 조선족들이 만든 장편영화가 2편이 나왔는데, 제가 <궤도>를 통해 받았던 행운이 조금씩 퍼져간다고 생각해요. <궤도> 때문에 유럽의 영화제도 가보고 그랬지만, 개인적인 의미보다도 영화하겠다는 옌볜 청년들에게 자극을 줄 수 있어서 더 좋아요.
-초기의 제작비는 거의 대부분 혼자 감당했을 텐데요. =얼마 썼는지는 모르겠어요. 돈이 되든 되지 않든 일단 간다. 뭐 그랬는데, 초기에 돈은 마누라 몰래 두들겨 만들었죠.
-어떻게 두들겨서 만들었나요. =방법이 다 있어요.
-‘옌볜텔레비죤방송국드라마부’에는 어떻게 입사하게 됐나요. =대학에서는 정치학을 전공했어요. 그런데 우리 때만 해도 대학 졸업하고 나면 문화인들은 농사 지으러 시골에 가야 해요. 제가 간 곳은 림장(林場)이었는데, 벌목하는 곳이에요. 전기도 없이 촛불 걸어놓고 일하는 곳이었는데, 거기 있다 보니 이러다가 인생 망치겠구나 싶었어요. 다행히 카메라를 얻게 돼 <옌볜일보> 등에 사진과 글을 투고했는데 그게 몇번 실렸어요. 그러다가 림업국(林業局) 선전부에서 저를 데리고 갔어요. 큰 동영상 카메라도 만져보게 되고,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옌볜 TV 방송사에 시험쳐서 가게 됐고. 베이징전영학원에서 촬영을 전공한 건 1996년인데 그때 방송사에서 연수 형식으로 보내줘서 공부 많이 했어요. 전에는 왜 이 장면을 이렇게 찍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론이 없었는데, 거기 가서 알게 된 거죠.
-다음 작품은 뭔가요. 회사는 혹시 그만두시나요. =왜 그만둬요. 좋은 직장인데. (웃음) 제가 계획을 세워놓고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다만 마음이 결정되면 만들고 보자는 주의예요. 하나 만들었으니까 다음에도 이쪽으로 가겠지요. 혹시 중음신(中陰身)이라고 들어봤어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마흔아홉날 동안 세상에 떠 있다는데, 누군가 죽고 나면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궁금하잖아요. 그런 걸 좀 만들어볼 생각이긴 해요. 얼마 전에도 옌지에서 스님하고 반날 정도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제가 설악산을 좋아해요. 남성적인 선이 좋고. 이번에 머물면서도 기회가 되면 일주일 정도 가서 텐트 쳐놓고 살고 싶어요. 거기서 스님들 만나서 신작 구상도 좀더 하고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