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으로 <철콘 근크리트>를 만났다면 꼭 만화 원작을 읽어보라 권하고 싶을 정도로 만화가 마쓰모토 다이요의 세계는 매혹적이다.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은 독창적인 그림체와 파격적인 연출, 그리고 감각적인 캐릭터 덕분에 만화제국 일본에서도 그는 거의 숭배의 대상이다. 최근 국내에 발매된 <제로>는 1991년에 집필한 그의 초기작으로 ‘대양(大洋: 다이요)의 전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의미있는 작품이다. 만화는 너무나 거대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나머지 그 재능을 산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복서 고시마의 처절한 숙명을 담고 있다. <철콘 근크리트> <핑퐁> <하나오> 등 그의 후속작에 등장한 캐릭터들이 성장통을 겪을지언정 어떻게든 타고난 재능을 개화시키는 것과는 달리 <제로>의 고시마는 그 재능에 잘근잘근 씹혀가며 ‘산화’라는 비극적인 정점을 맞이하고 만다. 작품 전반을 통해 마쓰모토 자신처럼 타고난 천재들이 세상과 어떻게 접점을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한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이 작품 이후 그가 더 긍정적인 형태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20년 가까이 묵은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체와 연출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감각적이다. 특히 그의 유려한 필체로 그려지는 복싱 시퀀스들은 내로라하는 복싱영화에서도 구경하지 못한 매혹적인 폭력의 미학이니 꼭 필견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