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인표는 바른생활 사나이입니다. 그는 부모 잃은 아이들을 입양했고 수많은 봉사활동에 참여했으며 기부도 많이 했습니다. 전 여기에 전혀 냉소적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되는 한도 내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건 그냥 좋은 겁니다. 그리고 저나 이 글을 읽는 대부분 사람들은 차인표만큼 유익한 삶을 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른생활 사나이라는 말은 이죽거리는 농담처럼 들립니다. 사실은 이 표현 자체가 농담이죠. 지나치게 이미지가 모범적인 사람들은 은근히 괴상하고 코믹하게 보일 위험성이 있습니다. 배우들의 경우라면 그 이미지는 더 위험하죠. 배우의 일은 다양한 인간 행동과 심리를 설득력있게 구현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이미지를 위해 ‘바른생활 사나이’가 되는 걸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폴 뉴먼이나 제임스 스튜어트를 보세요. 그들은 평생을 ‘바른생활 사나이’로 살아왔지만 여전히 흥미진진한 영화 스타이고, 올바른 사생활 때문에 지루한 인물이라고 찍힌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차인표에게 ‘바른생활 사나이’라는 딱지는 치명적인 핸디캡입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이건 입력과 출력 어느 쪽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배우들에게 입력은 인간 행동에 대한 이해이고 출력은 그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테크닉입니다. 배우 차인표에 대한 지적은 대부분 후자에 치중하고 있지만 전 전자쪽에 신경이 쓰입니다. 전 종종 그가 평범한 인간의 더러움과 불완전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자연인 차인표에서 멀어질수록 그의 연기는 뻣뻣해지고 흉내에 가까워집니다. 폴 뉴먼이나 제임스 스튜어트가 컴컴한 연기를 하면 우린 그들을 통해 마음속의 지옥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인표가 어둠의 세계에 뛰어들면 차인표 분노 3종 세트가 나옵니다. (음, 그래도 변명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차인표가 <홍콩 익스프레스>에서 보여준 연기는 전체적인 맥락을 통해 보면 그렇게까지 심하게 웃기지는 않습니다. 공평해지기 위해 분명히 밝혀두고 싶었어요.) 그 때문에 자연인 차인표의 ‘선함’이 좋은 환경에서 자란 모범생의 피상적인 선행 이상은 아니라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죠. 다시 말해 그의 ‘바른생활 사나이’ 이미지는 자연인 차인표 실제 생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배우 차인표의 비교적 제한된 연기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고정된 이미지를 극복하는 길은 ‘바른생활 사나이’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배우로서의 자신의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 입증하는 것이죠.
얼마 전에 차인표는 <크로싱>이라는 영화에서 새터민 아버지를 연기했습니다. 얼핏 보면 굉장히 힘겨워 보이죠. 함경도 사투리로 대사를 읊어야 하고 외모도 그에 맞게 조절해야 하며 촬영 환경도 거칠기 짝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자세히 보면 <크로싱>이 차인표에게 거의 이상적인 역할을 주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사투리로 대사를 읊게 되자 거의 기계적으로 보이던 그의 연기 매너리즘이 많이 죽었어요. 아내와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꽉 차 있는 순박하고 단순한 아버지는 차인표가 가장 쉽게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였고요. 게다가 살짝 기독교 성향이 섞인 이 북한 영화에는 배우 자신의 확고한 믿음이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물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배우 차인표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 남들이 스타가 되기 직전에 하는 연기를 지금에야 보여준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