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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위한, 여자에 의한 영화 <하트브레이크 호텔>
안현진(LA 통신원) 2008-06-25

여성관객 공감 지수 ★★★★ 더 늙기 전에 즐기자 지수 ★★★★☆ 클러빙 충동 지수 ★★★☆

산부인과 의사 엘리자베스(헬레나 버르크스트롬)는 아들의 결혼식 날 주차단속원과 승강이를 벌이다 간신히 식장에 도착한다. 엘리자베스는 최근 남편의 요구로 이혼했는데, 아들의 결혼 서약에서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에 이르자 코웃음을 칠 만큼 회의적이다. 주차단속원 구드룬(마리아 런드비츠)은 외출 좀 하라는 딸의 성화에 복통을 핑계댔다가 도리어 산부인과 진료를 예약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산부인과 의사와 환자라는 민망한 관계로 재회한다. 악연으로 시작된 인연은 비슷한 연배에다 이혼했다는 공통점 덕분에 우정으로 발전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하트브레이크 호텔’은 두 사람이 인생을 즐기려고 찾아가는 나이트클럽인데, 이름과 목적의 불협화음처럼 모순적인 공간이다. 조각난 마음을 추스르고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지만, 술먹고 춤추던 남자들도 둘의 나이를 알게 되면 표정을 바꾸고 떠날 뿐이다.

“스웨덴식 <델마와 루이스>”라는 수식은 이 영화에 대한 최상의 설명은 아니다. 강도와 살인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어 절벽으로 차를 몰아갔던 <델마와 루이스>와, 어느 날 돌아보니 혼자가 되어 있는 여자들이 벼랑에서 평지로 오르는 여정을 그린 <하트브레이크 호텔>은 그 방향부터 다르다. 남자로부터 상처받은 여자들의 우정이라는 큰 얼개는 같을지 몰라도 경쾌한 동시에 현실을 잊지 않은 <하트브레이크 호텔>은, 그래서 뒤따르는 그림자가 몇 곱절은 더 어둡다. 화려한 조명 아래 파티타임은 신나지만 시끌벅적한 그 속에서도 한순간 마음을 놓으면 외로움이 엄습해올 것이라는 사실을, 관객도 영화 속 두 여자도 잘 알고 있다. 두 여자의 모습 위에 나와 내 어머니의 모습이 겹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20대는 불안하고 30대는 여유가 없지만, 40대는 애매한 나이다. 포기하기엔 아깝고 새롭게 시작하기엔 겁이 난다. 마음대로 떠났다 갑자기 돌아오겠다는 전남편들이나, 즐기라고 부추겨놓고 정작 클럽에서 엄마를 만나자 부끄러워하는 아이들도 그녀들을 외롭게 만든다. 바로 그런 현실적인 외로움 때문에 구드룬은 남편의 재결합 제안을 받아들이려 하고, 엘리자베스는 친구에 대한 질투와 분노의 중간쯤 되는 감정을 지닌 채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여성 뮤지션의 음악으로만 채워진 O.S.T가 뒷받침하듯이 이 영화는 여자를 위한, 여자에 의한 영화다. 전남편들과 클럽에서 스쳐가는 남자들에 오토바이 부대까지 등장하지만, 영화는 가냘프고 꼿꼿한 두 여자의 어깨 위에 실린다.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나눌 동지가 꼭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일 필요가 없다면 두 여자가 서로를 선택하는 결말은 어떤 가능성을 남긴 오픈엔딩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중년의 로맨스나 동성애, 파국에 기대지 않아서 오히려 신선한, 미더운 봉합이다.

tip/ 스웨덴영화지만 메가폰은 영국 출신 감독 콜린 너틀리가 잡았다. 낮에는 흰 가운을 입은 의사에서 밤에는 미니스커트를 입는 작업녀로 탈바꿈하는 엘리자베스를 연기한 헬레나 버르크스트롬은 너틀리의 부인으로, <블랙잭>(1990)에서 처음 만나, <언더 더 선> <하트브레이크 호텔> <앤젤>까지 남편이 만든 12편의 영화에 출연해 찰떡궁합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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