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왜 놀라시죠?
-<둠스데이…>를 본 직후라 그렇습니다. 실례가 됐다면 용서하세요. 제가 아무나 보고 이렇게 놀라진 않는데 말입니다. =제가 뭐 아무 모가지나 꺾는 스티븐 시걸도 아니잖아요. 안심하세요.
-그럴 리가요. 스티븐 시걸의 손에 사라진 수많은 무명 인간들보다 더 많은 인간들을 며칠 만에 해치우셨는데요. 사상자 수로 따지자면 <코만도>에 육박하고, 살상법의 잔혹도로 따지자면 <킬 빌>에 버금갑니다요. 싱클레어씨는 이제 <에이리언>의 시고니 위버나 <터미네이터>의 린다 해밀턴급에 오르실 것 같아요. =흠. 이거 혹시 싫다는 이야기?
-좋단 소리죠(굽실굽실). 근데 이런 질문은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눈은 어쩌다가 그러셨어요? =어쩌다가 그랬는지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정말 중요한 건 더 좋은 눈을 찾았다는 거죠.
-맞습니다. 맞고 말고요. 의안을 적외선 동영상 카메라로 사용할 수 있다니. 저도 하나 갖고 싶어요. 막 자유자재로 뺐다 꽂았다 하는 것도 무지 편리해 보이고요. 게다가 안대! 토털리 시크하고 힙하고 엣지해요. 트렌디한 블랙 레더 블루종이랑 매치하면 올 가을 시즌 아이템으로도 완벽할 것 같아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예쁘라고 한 건 아닙니다.
-에이. 그래도 그 오라질 지옥 같은 데서도 시크한 블랙으로 쫙 빼고 계시는 게 센스가 보통이 아니시던데요. 게다가 안대를 하고 계시니까 뉴욕이랑 LA에서 탈출극 벌였던 그 남자가 기억나던데. 이름이 뭐더라…. =스네이크. 스케이크 플리스킨.
-아. 맞습니다. =제 우상이죠.
-그럴 줄 알았습니다. 두분이 사귀면 딱 좋을 것 같던데. 불행히도 활동하시는 연도가 달라서…. 근데 두분 처지가 아주 비슷해서 놀랐어요. 싱클레어씨 꼴이 완전 독에 갇힌 스네이크였잖아요. 아무리 소수 정예부대라지만 48시간 안에 치료제를 구해오라고 시키는 정부놈들 명령이 말이 되냔 말이죠. =그 인간들이야 시키면 다 되는 줄 알죠. 하지만 저는 시키면 뭐든 하는 군인이잖아요. 게다가 저로서는 어린 시절 버리고 온 고향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목적이 있었으니까요. 정부가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든 간에 저로서는 꼭 바이러스 치료제를 찾고 싶었어요. 그게 잊혀진 고향에 속죄하는 방법일 수도 있으니까요.
-글래스고는 저도 가본 적이 있는데요, 영화랑 그리 다르지 않더라고요. 힘 좋고 무식한 축구광 노동계급 양아치들이 길거리에 널려 있는데다가, 꼴들을 보아하니 영화에서처럼 식인도 할 것처럼 생겨먹었던데 다들. 사실 돈없는 배낭여행자 주제에 스코틀랜드 산업도시에는 도대체 왜 갔는지 저도 의문입니다만. 그나저나 진짜 재미있는 게 있어요. <둠스데이…> 속 영국은 남북 분단 국가잖아요. 근데 북부를 지배하는 건 중세형 독재자고, 남부를 지배하는 건 대운하를 만들어서 바이러스 걸린 국민들을 격리하고 있고. 이거 완전 제가 사는 나라랑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 대체 거기가 어디죠?
-아.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라고. 극동에 있는 쬐깐한 나란데요. =제가 필요하세요?
-하루라도 빨리 와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삽질 시작하기 전에 와주시면 더 좋고요. =근데 자동차 몰고 대륙 횡단해서 가면 며칠이나 걸리려나.
-엥. 영화에서 모셨던 그 차 끌고 오시려고요? =벤틀리와 재규어니까 괜찮을 거예요. 자동차 중의 자동차니까요. 영국 자동차잖아요.
-에이. 요즘은 제임스 본드 양반도 벤틀리랑 재규어 안 타요. BMW로 갈아탄 지가 언젠데. 영국 자동차 산업이야 옛날에 맛이 갔죠. 요즘은 독일제랑 일본제가 최고… 퍽!(목 꺾이고 배 터지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