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목을 제대로 외울 확률 지수 ★ 독립단편애니메이션의 희망 지수 ★★★★> 감독들의 창의력 지수 ★★★★
셀마의 단백질 커피. 바리스타 셀마가 단백질 커피를 만드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제목은 단지 세편의 애니메이션을 하나로 묶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셀마는 김운기 감독의 단편영화 <원티드>에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노파고, 단백질은 연상호 감독의 <사랑은 단백질>의 중요한 테마이며, 커피는 장형윤 감독의 <무림일검의 사생활>에서 자판기로 환생한 검객이 만들어내는 음료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는 무척 중요하다. 하나의 주제로 묶인 옴니버스 장편애니메이션(<별별이야기>)은 있었지만, 전혀 다른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된 단편영화 모음이 개봉한 경우는 전무했기 때문이다. <인디애니박스: 셀마의 단백질 커피>는 60분 이상의 장편애니메이션이 시장을 장악한 가운데 단편의 활로를 모색하는 새로운 시도다. 취지에 맞게 각각의 작품은 ‘서로 다름’을 확연히 드러내며 고유의 개성을 뽐낸다.
시작을 여는 <원티드>는 이국적인 그림체가 인상적인 애니메이션이다. 1987년 7월15일, 한국을 강타해 345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태풍 셀마를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인물과 배경은 유럽의 시골 풍경처럼 묘사된다. 셀마라는 이름의 수상한 노파가 나타난 뒤, 마을에는 폭우가 쏟아진다. 집이 물에 잠기고 나무배에 올라탄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린다. 그러나 정부는 인명구조보다는 범인 찾기에 전념하고, 구호물품으로 곰인형을 지급하는 등 비효율적인 대책만 일삼는다. 영화는 고립된 마을 사람들의 공포와 정부를 향한 풍자를 엇박자로 전개하며 묘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재난이란 무거운 주제를 미스터리스릴러 형식으로 풀어내는 감독의 센스가 돋보인다.
<원티드>가 우화에 가깝다면, <사랑은 단백질>은 세 영화 중 가장 적나라한 방식으로 인간의 양심에 의문을 제기한다. 연상호 감독은 2003년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호러애니메이션 <지옥>을 제작한 바 있는데, 이번 영화에서도 악동의 기질은 여전하다. 자취생 세명이 치킨을 시켜 먹는데 알고 보니 그 닭이 치킨집 주인의 아들 ‘닭돌이’였다는 설정. 제발 먹지 말아달라고 사정하는 주인 앞에서 배고픈 자취생들은 갈팡질팡한다. 만화가 최규석의 원작 만화를 토대로 한 이 영화는 실사영화에 펜으로 그림을 입힌 로토스코핑 기법으로 촬영했다. 특히 캐릭터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성우의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무림일검의 사생활>은 한국 멜로애니메이션의 발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직 무술만 생각했던 검객 진영영은 찔러도 죽지 않는 강철 커피자판기로 환생한다. 그런 그의 앞에 분식집 알바 소녀 혜미가 나타나고, 진영영에게도 사랑이 찾아온다. 밤에는 사람의 모습으로 지내다가도 부끄러운 감정을 느낄 때마다 자판기로 돌아간다는 설정 등 소소하게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이 많다. 과잉되지 않게 풋풋한 사랑을 연출해낸 장형윤 감독의 감성은 <초속 5센티미터>의 감독 신카이 마코토와 비교할 수 있을 듯하다.
tip/<원티드>는 올해 세계 4대 만화영화제 중 하나인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와 6월26일 열리는 제7회 미쟝센단편영화제의 ‘절대악몽’ 섹션에 진출했다. 한편 다른 두편 또한 미쟝센단편영화제의 ‘희극지왕’(<사랑은 단백질>), ‘4만번의 구타’(무림일검의 사생활) 섹션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