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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오디세이] 코미디로 풀어낸 메타시네마의 효시

<셜록 주니어> Sherlock Jr., 버스터 키튼, 1924

할리우드가 세계영화 시장을 석권한 것은 1차대전 때부터다. 유럽영화가 전쟁으로 침체기에 빠졌을 때, 유럽과 세계의 극장에선 미국영화가 넘쳐났다. 전쟁이라는 변수가 컸지만, 무엇보다도 영화 자체가 대중의 요구를 크게 만족시켰다. 유럽의 관객은 특히 그리피스 같은 멜로드라마 감독들이 보여주는 눈물 나는 이야기에, 또 맥 세네트 같은 코미디 감독이 펼치는 포복절도할 개그장면에 환호했다. 그러자 이런 영화들이 계속하여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버스터 키튼은 좀 달랐다. 다른 영화인들이 여전히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 몰두할 때, 그는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했다. 다시 말해, 영화 매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 장본인으로 버스터 키튼은 기록되는 것이다.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는 영사기사의 이야기

이른바 ‘성찰적’(reflexive)인 영화가 나온 것으로, 마냥 세상을 비추기만 하던 영화가 드디어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는 성숙한 태도를 보였다. <셜록 주니어>(1924)가 그 분수령이다. 메타시네마, 곧 영화에 대한 영화인데, 메타시네마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지가 베르토프의 <무비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가 나오기 5년 전이다.

극장의 영사기사가 주인공(버스터 기튼)이다. 영화에 극장, 영사기사 같은 영화 내재적인 소재가 성큼 들어온 것이다. 영사기사는 셜록 같은 유능한 탐정이 되고 싶다. 영화를 틀어놓고 셜록 소설을 읽는 게 그의 취미다. 하지만 그의 재능은 셜록과는 한참 멀어 보인다. 실제 생활에서 그는 사랑하는 여성에게 선물을 하려다 어이없이 도둑으로 몰려 그 집에서 쫓겨나는 멍청이다. 탐정은 고사하고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면 다행이다. 눈앞에서 애인을 도둑 같은 남자(실제로 그가 도둑)에게 빼앗긴 그는 힘이 쭉 빠진 채 영화관에 돌아온다.

오늘 상영되는 영화는 <사랑과 진주>다. 늘 하듯 필름을 영사기에 끼워놓고 책을 드는데, 피곤한지 금방 잠에 빠진다. 그런데 꿈속에서도 그는 영화를 보는데,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과 너무 닮았다. 도둑 같은 남자가 진주를 훔쳐, 그 진주로 사랑을 획득하려는 이야기다. 영화 이야기가 자기의 실제 이야기와 겹치지 않은가. 그는 사건을 해결하고 싶은 열망에 빠진다. 순간, 할리우드 영화사에 영원히 남을 명장면이 펼쳐진다. 꿈속의 그는 영사실에서 일어나, 스크린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영화와 현실이 서로 뒤섞이는 순간이 열린 것이다. 공연물에서 철칙처럼 지켜지던 ‘제4의 벽’, 곧 무대와 객석의 경계는 가볍게 위반됐다.

스크린으로 들어간 그는 영화 매체라는 것이 어떤 고유한 특성을 가진 것인지를 보여주려고 작정한 듯하다. 먼저 공간의 자유로운 이동이다. 연극을 떠올려보라. 바꿀 수 있는 공간이 겨우 서너개다(3막 혹은 4막). 영화는 공간이동이 무한정이다. 영사기사는 한 장소에 머물러 있는데, 장소는 변화무쌍하게 바뀐다. 정원에 있었는데, 한 발짝 움직이니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시의 한복판이고, 한 걸음 움직이니 산의 절벽에 와 있으며, 다시 내려오니 사자들이 어슬렁대는 아프리카에 와 있다. 오직 영화만이 자유로운 공간이동이 가능한 사실을 뻐기듯 버스터 키튼은 편집을 이용하며 계속하여 웨스턴의 서부로, 바다로, 설산으로, 다시 정원으로 숨 가쁘게 이동한다. 모두 한 발짝만 움직이는데 그렇게 된다.

영화 고유의 문법이란 무엇인가

두 번째는 시간의 자유로운 변경이다. 영화 속 영화 ‘사랑과 진주’에서 영사기사는 셜록의 후계자, 곧 ‘셜록 주니어’가 되어 사건을 해결하는 듯싶더니 결정적인 순간에 물에 빠져 연인과 함께 허우적대고 있다. 물에서 빠져나오려고 팔을 휘젓다 그는 꿈에서 깨어난다. 그때, 자신을 도둑으로 오인했던 연인이 영사실로 찾아와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됐다며 사과한다. 두 사람은 영사실에서 영화를 함께 본다. 영화는 해피엔드로 진행 중이고, 주인공들이 포옹하고, 키스할 때, 영사기사과 연인도 배우처럼 포옹하고 키스한다. 그런 뒤, 영화 속의 영화에선 배우들이 태어난 자식들과 함께 놀고 있다. 영사기사 버스터 키튼은 “저건 어떻게 따라하지요?”라고 묻는 듯 관객을 바라보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자유자재로 처리할 수 있는 영화 속 시간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영화 매체의 속성에 관한 성찰로, 빼어난 코미디 한편을 완성한 그의 업적은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로 상찬된다. 앨런의 영화에선 현실 속의 인물이 키튼의 영사기사처럼 스크린으로 들어간 뒤, 다시 스크린 속의 인물들을 현실로 데리고 나오기까지 한다. 영화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더욱 깊어지고 복잡해지고 있는데, 그 첫돌을 아주 쉽고 경쾌하게 놓은 감독으로 버스터 키튼은 남아 있는 것이다.

한편 하도 잘 넘어지고 자빠지고 해서 키튼은 ‘버스터’(buster)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이게 이름이 됐다. 그는 이름에 걸맞은 ‘실제로 하는 스턴트’로 단숨에 스타가 됐다. <셜록 주니어>에도 그런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기찻길 추격장면에서 열차용 물탱크의 폭포 같은 물을 뒤집어쓰다 목뼈가 위험할 정도로 부러졌는데 부상 여부도 모르고 연기를 마친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진 에피소드다. 아찔한 성룡 스턴트의 원본은 대개가 버스터 키튼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다음엔 로버트 시오드막 감독의 <살인자들>(The Killers, 1946)을 통해 플래시백의 매력을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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