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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거기 없는 것을 어떻게 불러낼 것인가? [2]

혹은 <아임 낫 데어>는 펠리니의 <8과 1/2>이 아니다. 물론 토드 헤인즈는 펠리니에게서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게다가 영화 중간에 펠리니의 <카사노바>에서 가져온 니노 로타의 음악을 시침 뚝 떼고 쓰기까지 한다. 마치 자, 지금 저는 펠리니를 베끼고 있습니다, 라고 노래라도 부르듯이. 그러나 여기에는 창작의 위기도 없고, 그렇다고 상황도 없다. 혹은 승화시켜야 할 그 어떤 목표를 가진 것도 아니다. 토드 헤인즈의 목표가 있다면 전기의 무효화라고 할 만한 유머 안으로 밀어넣는다. 유머? 그렇다. 왜냐하면 <아임 낫 데어>에는 끝내 누가 말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끈질기게 이 영화에서 어떤 깊이나 너비를 찾으려는 이들을 실망시킨다. 토드 헤인즈는 여기서 영화의 어떤 표현의 방법을 확장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아임 낫 데어>가 유일하게 목표로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밥 딜런을 무의하게 만드는 데 있다. 나는 이것이 <아임 낫 데어>를 본 다음 거의 소스라치게 놀란 이유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 목표를 이룬다면 결국 무효가 되는 것은 밥 딜런이 아니라 영화라는 표현 그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회로의 중단. 영화가 활동하는 구심력 바깥으로 나가기. 그렇게 함으로써 원심력에 모든 것을 내맡겨버리기. 그때 서로 소통하는 것은 영화 안의 숏들 사이의 긴밀한 구조가 아니라 영화 바깥의 활동하는 정보의 네트워크들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분명히 어디선가 영화의 일부가 활동을 중단하고 있다. 그래서 종종 숏 안에서 진행되는 장면들 사이에 간격이 생겨날 때 그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표면들 사이에서 영화가 멈추자 갑자기 정보가 활동하기 시작한다.

같은 말의 다른 표현. 말하자면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의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 자서전의 원형이판본처럼 보인다. 그러나 밥 딜런의 팬들이라고 해서 <아임 낫 데어>가 눈에 착착 감기고, 에피소드들이 갑자기 질서정연하게 배치되며, 그 안에서 패러디들이 깔깔대고 웃을 만큼 선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 약간의 자화자찬을 허락하시길. 나는 <아임 낫 데어>의 모든 밥 딜런의 노래를 잘 알고 있다.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노래가 어느 음반의 몇 번째 곡이며, 그 곡의 가사가 무엇이며, 그것을 녹음할 때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으며, 그중에서 <John Wesley Harding> 이전의 노래들은 영화를 보면서 대부분 따라 부를 수도 있다. 그중 몇몇 노래들은 내가 그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날씨가 어땠는지, 그날 바람은 어디서 불었는지, 함께 사들고 온 음반은 무엇이었는지도 떠올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고작해야 십대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찾아온 다음 지나가버린 예민한 감수성과 사진을 찍듯이 기억되는 찬란한 날들. 그런 다음 나는 대학에 가서 밥 딜런의 전기를 읽었다.

밥 딜런이 언제 결혼을 했고, 언제 이혼을 했으며, 위자료 소송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도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교활하게 계약을 맺었으며, 조앤 바에즈와 그의 포크 동료들을 어떻게 이용했으며, 종종 천재처럼 보이기 위해서 얼마나 연기를 했으며, 즉흥적인 것처럼 보이는 많은 행동들이 얼마나 계산된 것들이었으며, 그의 아들과 어떤 식으로 결별했는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아임 낫 데어>가 분명해지지는 않는다. 토드 헤인즈는 그걸 모두 안다고 가정한 다음 그걸 무효화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혼란은 좀 이상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영화 속의 한 가지 예. 토드 헤인즈는 <아임 낫 데어>를 순서대로 배열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을 잘 이해해야 한다. 단지 영화 안에서 줄거리를 흩뜨린 다음 그 순서를 섞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방식이라면 이 영화는 줄거리를 따라가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토드 헤인즈가 목표로 하는 것은 영화 속에서 줄거리를 뒤섞는 것이 아니라 밥 딜런에 관한 정보의 연대기를 뒤섞는 것이다. 이 영화 속의 수많은 사례 중 한 가지 예. 이를테면 영화배우 로비는 가상인물이다. 그가 (영화 속의 설명에 따르면) ‘1965년에 출연한’ 실험적인 영화 <모래 한알>(Grain of Sand)은 ‘물론’ 존재하지 않는 영화이다. 정보의 대차대조표. 밥 딜런은 1965년에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대신 그해에 영국 순회공연 중 D. A. 페너베이커의 다이렉트 시네마 스타일의 다큐멘터리 카메라 앞에 서는 데 동의하였다. 이 영화는 밥 딜런이 모터사이클 사고 이후 사람들 앞에서 모습을 감춘 1967년에 처음 공개되었다. 그리고 66년에 페너베이커의 도움을 얻어서 밥 딜런 자신이 연출한 <다큐멘트를 먹어버려라>(Eat the Document)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1971년에 ‘제한적으로’ 공개되었다. 밥 딜런은 영화에 호의적이었다(이를테면 존 레넌과 비교해보라. 심지어 존 레넌은 고다르의 영화 출연 제안을 거절했다. 존 레넌은 고다르가 사기꾼이며 자기를 이용해서 돈벌이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고다르는 마음을 바꿔서 롤링스톤스와 <1+1>을 찍었다). 그런 다음 밥 딜런은 샘 페킨파의 <관계의 종말>에 출연하고 사운드트랙을 만들었다. 인터뷰에 의하면 이 영화에 출연하기 전까지 밥 딜런은 샘 페킨파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심지어 이 영화는 샘 페킨파가 <와일드 번치>(와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를 찍은 다음에 만든 영화이다!). 밥 딜런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을 하고(주연은 아니다), 연출을 한 <레날도와 클라라>는 <아임 낫 데어>만큼 어수선하고 종잡을 수 없게 진행된다. 만일 <아임 낫 데어>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영화가 있다면 <시민 케인>이나 <8과 1/2>이 아니라 밥 딜런이 연출한 <레날도와 클라라>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상영시간 3시간52분이나 되는 이 영화에는 조앤 바에즈, (밥 딜런의 노래를 가장 아름답게 커버 버전으로 부른 버즈의) 로저 맥귄, 밥 딜런의 음반에도 참여한 적이 있는 희곡작가 샘 셰퍼드(당신은 이 이름을 존 카사베츠, 로버트 알트먼, 빔 벤더스, 짐 자무시의 영화에서도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인 앨런 긴스버그에 이르는 그의 친구들이 총동원된다. 말 그대로 <레날도와 클라라>는 밥 딜런 버전의 ‘코뮌’이라고 부를 만하다. 심지어 이 영화는 그해 칸영화제에 초대되었다(하지만 잼 세션에 가까운 방식으로 진행되는 롤링 선더 레뷰 순회공연 중이어서 ‘바쁘다’는 이유로 영화만 상영되고 밥 딜런은 크루아제트의 빨간 주단을 밟지 않았다). 가장 끔찍한 영화는 (<스타워즈6: 제다이의 귀환>을 연출한) 리처드 마켄드의 <핫 오브 파이어>(1987)일 것이다. 여기서 밥 딜런은 ‘한물간 가수’로 출연했다. 그런 다음 거의 15년 뒤에 밥 딜런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래리 찰스가 연출한 <가면을 쓰고 익명인 채로>에 다시 출연했다(2003년). 여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다(그리고 여기에 마틴 스코시즈가 편집한 다큐멘터리 <노 디렉션 홈>(2005)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어디에도 <모래 한알>이라는 영화는 없다. 대신 그 제목을 떠오르게 만드는 노래를 부른 적은 있다. 1981년에 녹음한 <Shot of love>의 B면 맨 마지막에 담긴 <Every Grain of Sand>은 이 음반에서 가장 좋은 노래이다. 그렇기 때문에 밥 딜런 팬이라면 이 제목을 듣는 순간 누구라도 이 음반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1981년의 밥 딜런은 1965년의 밥 딜런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다른 노래를 불렀다). 두 번째 예. 토드 헤인즈는 심지어 일곱명의 밥 딜런이 나올 때 그들의 시대와 밥 딜런이 부른 노래를 일치시키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노래가 어느 음반에 실려 있으며, 그 음반이 언제 출반되었는지를 아는 그의 팬들은 종종 길을 잃게 된다. 질문은 간단하다. 그렇게 해서 <아임 낫 데어>는 무엇을 얻었는가?

현재를 회고처럼 다루려는 감독의 의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아임 낫 데어>가 마치 밥 딜런이 죽은 것처럼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애도의 위장이 있다. 아직 상실되지 않은 존재를 대상의 부재라는 형식으로 다룬 다음 대리인을 내세워서 진행시키려 들 때 처음부터 실패를 전제로 한 애도를 통해서, 가짜 환영을 내세워서, 거짓 분신을 내세워서, 토드 헤인즈는 현재를 회고처럼 다루려고 한다. 현재의 죽음. 시간이 사라진 현재.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영안실에 누워 있는 (1965년에서 66년 사이의 전기기타 시대의 밥 딜런을 변장한) 쥬드를 보여준다. 물론 밥 딜런은 1966년 7월29일 우드스탁 근처를 달리다가 거의 죽음에 이르는 사고를 당했다. “턱이 완전히 나가버렸고, 어쩌면 의사는 그가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했다”(그레일 마커스의 밥 딜런 전기). 뇌진탕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런 다음 밥 딜런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때는 마약과 플라워 컬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다. 많은 가수들이 갑자기 죽었다. 록칼럼니스트 데이브 마시는 “로큰롤 산업은 자살을 먹고산다”고 경고했다. 저널들은 자살을 미화했고, 가수들은 죽음을 통해서 신화에 올랐다. 밥 딜런은 로큰롤의 속죄양이 되었다. 혹은 그가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밥 딜런은 ‘빅 핑크’라는 애칭을 단 지하실에서 더 밴드와 세션 녹음을 했다. 그리고 그 녹음은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었다. 소문은 소문을 낳는 법. 로큰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녹음이 거기 담겨 있다는 말도 돌았다. 수많은 해적 음반들이 나타났다. 갑자기 1967년 크리스마스가 막 지난 12월27일 뉴욕 컬럼비아 스튜디오에 밥 딜런이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세명의 세션맨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리고 마치 이제까지 그를 논란으로 몰고 간 로큰롤을 한 적도 없다는 것처럼 언플로그드로 놀랄 만큼 단조롭고 음울한 12곡을 녹음했다. 밥 딜런은 종종 10분이 넘는 노래를 불렀지만 이 음반에는 그런 노래가 없다. 전체를 다 들어도 고작 37분55초 정도의 레코딩이었다. 그때까지 발표한 음반 중에서 가장 짧다(하지만 뒤이어 발표한 <Nashville Skyline>은 그보다 10분이나 더 짧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다. 비틀스는 명상을 하기 위해 인도로 갔다. 지미 헨드릭스는 기타를 물어뜯으면서 피드백 노이즈로 가득 찬 미국 성조가를 연주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자기 공연에 전기를 꽂았다. 삼인조 크림은 무대에서 오로지 기타 연주만으로 20분이 넘는 애드리브를 진행했다. 그러나 밥 딜런은 마치 시대에 역행이라도 하듯 컨트리풍의 짧은 노래를 불렀다. 그는 동시대의 로큰롤을 거의 외면했다. 그런 다음 빅 핑크에서 녹음된 노래들이 <Basement Tapes>라는 이름 아래 정식으로 출반된 것은 1976년의 일이다. 만일 <아임 낫 데어>에서 토드 헤인즈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앨범이 있다면 바로 이 음반일 것이다. 아니, 차라리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에 관한 전기라기보다는 <Basement Tapes> 비사(秘史)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이다.

<아임 낫 데어>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를 다시 분류할 수 있지만 크게 두개의 블록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밥 딜런이 모터사이클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이고, 다른 하나는 리틀 타운에 은거한 다음이다. 이게 이상한 것은 영화 안에서 서사를 놓고 나눈 것이 아니라 영화 바깥에서 밥 딜런의 삶에 관한 정보를 놓고 반대로 영화 안에서 분류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이전까지가 밥 딜런의 행적의 (거의 초현실주의적) 재현이라면 그 이후는 명백히 샘 페킨파의 <관계의 종말>의 (장르적) 오마주이다. 심지어 빌리로 변장한 밥 딜런이 은거하는 리틀 타운의 시대적 무대는 채플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밥 딜런은 1941년에 태어났다). 좀더 이상한 점. 그런데 페킨파의 영화에서 빌리로 나온 건 밥 딜런이 아니라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다(그리고 크리스는 <아임 낫 데어>에서 내레이션을 한다. 말하자면 그는 영화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여덟 번째 밥 딜런이다). 이때 우리가 듣는 노래는 <Basement Tapes>에 실려 있는 <Goin' to Acapulco>이다.

여기서 사태가 복잡해지는 것은 단지 밥 딜런만이 여섯명의 배우가 일곱명의 다른 이름의 밥 딜런으로 연기한다는 것이 아니다. 브루스 그린우드도 변장을 하고 다른 밥 딜런 앞에 나타난다. 그 첫 번째. 밥 딜런이 전기기타를 들고 더이상 저항 포크를 부르지 않을 것이며, 정치적인 문화운동을 조롱하고, 지금은 잘난 체할지 모르지만 너도 언젠가 돌처럼 굴러다닐 때가 올 거야, 그때 어디 한번 느껴봐(‘Like a rolling stone’)라고 노래할 때 영국 방송 앵커인 키난 존스는 차에 함께 동승해서 쥬드로 변장한 밥 딜런에게 공격적으로 질문한다. 그는 쥬드에게 왜 당신이 이전에 불렀던 노래들을 더이상 믿지 않느냐고 묻는다. 쥬드는 자신이 양아치가 아니라 얘기꾼에 불과하다고 대답한다. 그래도 매일 부르는 노래에 생각이 있을 것 아니냐고 다시 묻자 쥬드는 화를 내면서 어떻게 감히 그렇게 질문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차를 멈춘 다음 내린다. 쥬드의 등에 대고 키난 존스는 말한다. 그래도 나는 믿어요. 당신이 양심에 따라 노래를 불렀다는걸. 그러자 쥬드가 돌아서서 묻는다. 내가 뭘 느껴야 하는데? 키난 존스가 대답한다. 이를테면 고통, 슬픔, 사랑과 같은 감정. 쥬드는 대답한다. 나한테 그딴 것은 없어요. 그런 다음 갑자기 영화는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몽상처럼 진행된다. 혹은 펠리니의 영화 한 장면처럼 보인다. 화장실에서 나온 키난 존스가 엘리베이터를 타자 그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공연 무대로 바뀐다. 그리고 거기서 쥬드가 <Ballad of a Thin man>을 분노에 차서 부르고 있다. 키난 존스는 자신이 무대 위의 서커스 공연이 진행되는 철창에 갇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장면은 그런 다음 거의 연상 작용처럼 진행된다. 키난 존스와 쥬드는 말싸움 중에 흑인해방 무장단체 블랙 팬더에 대해 말했는데, 갑자기 영화는 그들이 이 노래를 녹음 릴에 걸어서 마치 비밀 메시지가 거기 담겨 있는 것처럼 반복해서 듣는 장면과 연결시켰다. 그러나 이 장면의 맥락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이 신은 갑자기 맥락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노래가 계속된다. 그리고 이 장면은 1966년 5월17일 그 ‘악명 높은’ 맨체스터 라이브로 이어진다. 공연 중 누군가가 일어나서 외친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라는 야유. 밥 딜런은 중얼거린다. “난 당신 말을 믿지 않아.” 그리고 그 자리에 키난 존스가 앉아 있다. 밥 딜런은 멀리 도망치고 싶다고 몇번이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의 탈주는 성공했을까?

그런데 브루스 그린우드는 망령처럼 그를 쫓아온다. 밥 딜런이 죽음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샘 페킨파의 영화 속으로 들어가서 빌리라는 이름으로 은자처럼 살고 있을 때 브루스 그린우드는 팻 개럿트가 되어 그 앞에 나타난다. 팻 개럿트는 이 조용한 마을에 철도를 놓을 생각이다. 빌리는 마을 사람들이 팻 개럿트와 그의 악당들이 위협하는 자리에 나가서 서 있다가 질문한다. 왜 꼭 여기를 통과하려고 합니까, 돌아가는 방법도 있는데. 그러자 팻 개럿트는 유심히 바라보다가 말한다. 나는 당신과 같은 친구가 있는데, 아주 노래를 잘하는. 브루스 그린우드는 여기서 잔뜩 수염을 붙이고 나이 든 노인의 모습의 팻 개럿트로 분장하고 있어서 거의 알아보기 힘들다. 토드 헤인즈는 팻과 키난 존스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빌리 더 키드와 번갈아 보여주면서 팻 개럿트를 향해서 느리게 줌인할 때 재빨리 쥬드를 바라보던 키난 존스를 보여주던 느린 줌아웃을 다시 불러온다.

물론 이 두개의 공존 혹은 단절에 대해서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설명이 아니라 질문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분류 방법에 대해 올바르게 질문을 던지면 우리 시대의 영화가 이미지에 관한 기호를 구성하고, 집합의 체계를 세우고, 무엇보다도 영화와 정보 사이의 공존 구도와 간섭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에 아홉 번째 밥 딜런이 나온다. 그는 ‘진짜’ 밥 딜런이다. 무대에서 하모니카를 불면서 노래를 부르기 직전이다. 무대는 어둡고, 조명은 등에 떨어지고, 얼굴을 숙이고 있기 때문에 그의 모습은 실루엣처럼 보인다.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그런 다음 긴 자막이 나온다. 그래서 이 마지막 자막을 모두 보려면 밥 딜런의 노래를 세곡이나 들어야 한다. 첫 번째는 밥 딜런 자신이 부르는 <Like a Rolling Stone>이다. 밥 딜런의 가장 유명한 노래. 두 번째는 소닉 유스가 편곡한 <I’m not there>이다. 물론 소닉 유스답게 거의 원곡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변주하고 있다. 마지막 노래는 앤토니 앤 더 존슨스가 부르는 <Knockin’ on Heaven’s door>이다. 이 노래는 <관계의 종말>의 사운드트랙으로 밥 딜런이 작곡한 곡이다. 그걸 앤토니는 거의 종잡을 수 없는 (그러나 남자의 가성으로 여성의 목소리에 가깝게, 아니 차라리 마를렌 디트리히의 현대적 버전이라고 부르고 싶은) 목소리로 부른다. 퀴어영화를 만든 토드 헤인즈다운 마지막 선곡이다. 물론 이건 유머이다. 내 질문은 그것이 아니다. 왜 이 노래가 마지막 노래여야 하는가? 이 노래는 죽어가는 자들에게 바치는 레퀴엠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밥 딜런은 죽은 것이 아니다. <아임 낫 데어>는 시종일관 추모를 바치는 것처럼 진행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토드 헤인즈는 왜 전기영화를 찍느냐는 말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잊기 위해서 영화를 찍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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