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커상 수상작가 아이리스 머독이 1954년 발표한 첫 소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그물을 헤치고>에서 ‘나’는 런던에서 잡문을 팔아 생계를 잇는 제이크 도나휴다. 측근의 묘사를 빌리면 그는 “재사지만 게을러서 일하지 않고, 좌익사상은 있으나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위인. 친구와 애인 집에 더부살이를 일삼는 제이크는 늘 자문자답에 사로잡혀 살아가며 일상에 철저히 무책임하다. 실연의 추억과 친구의 생각을 표절한 첫 책의 실패만이 그의 마음속에 오래 지속되는 기억이다. 어느 날 얹혀살던 여인에게서 쫓겨난 제이크의 생활은 크게 흔들린다. 옛 연인 애너와 재회하고 그녀의 동생인 배우 새디의 집에 머무는가 싶더니 배신한 친구 휴고가 그의 생활에 다시 등장한다. 자기 분열적 사색과 익살스런 모험으로 굽이치는 이야기는, 모든 인물이 상대의 등만 바라보는 사랑의 연쇄로 귀결된다. <그물을 헤치고>라는 제목은, 관념의 그물에 걸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다다르지 못하는 가엾은 상태를 가리킨다. 소설 속에서 휴고는 제이크에게 충고한다. “지금 노형에게 필요한 것은 휩쓸려 들어가는 일이오.”뛰어난 재능과 도인의 풍모를 겸비한 휴고의 모델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더 흥미롭다. 영국 사회 소설의 전통을 이은 작품답게 존재의 갈등을 그리면서도 코미디와 모험담의 재미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깨에 힘 빼고 읽을수록 만족스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