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영화 때부터 걸작 SF영화를 만들어온 유럽과 달리 할리우드가 이 장르에 눈길을 돌린 건 1940년대 말부터다.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장르영화의 시기에 SF영화 같은 판타지가 자리할 곳은 없었다. 극장 관객이 줄어들면서 상황은 바뀌었는데, 영화사들이 찾아낸 묘수 중 하나가 SF영화였다. 핵무기가 개발됐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정부가 공공연히 공산주의의 공포를 퍼뜨릴 무렵, 바야흐로 일상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과학은 두개의 얼굴로 비쳤다. 과학의 유익한 측면에 의지했던 사람들은 그 뒤로 두려운 무언가가 숨어 있을 거라고 짐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정서를 반영해 공포영화와 결합한 SF영화는 관객의 흥미를 끌었으며, 1950년대는 SF영화가 폭발한 시기로 기록된다. 게다가 작가의 아이디어와 저예산으로 꾸민 특수효과면 족했으므로 제작의 위험이 적다는 장점까지 있었다. B급 SF영화를 쏟아낸 영화사 가운데 유니버설사가 빠질 리 없었다. 일찍이 저예산 공포영화로 재미를 본 그들에게 SF영화는 B급영화의 광맥이었다. 유니버설의 SF영화 중엔 <놀랍도록 줄어든 사나이> <타란툴라>처럼 장르의 대표작으로 남은 것도 있으나, 대다수는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유니버설 고전 SF영화 컬렉션>은 시간을 건너 되살려낸 다양한 SF영화들을 선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표정의 남자배우와 세상에서 가장 비명을 잘 지르는 여자배우와 낯간지러운 홍보문구가 붙은 싸구려 영화를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돌연변이 생명체(<타란툴라> <두더지 인간> <교정의 괴물>), 외계로부터의 침입자(<살인 운석의 침공>), 거대 괴수(<미지의 땅> <죽음의 사마귀>) 등 B급 SF영화의 전형적 소재를 다룬 영화들과 그 밖에 원자시대를 은유한 <놀랍도록 줄어든 사나이> <닥터 사이클롭스>(파라마운트사 작품),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인간을 비판한 <거머리 여인>, 발 류튼의 영화가 연상되는 <코브라 밀교>가 박스 세트에 빼곡히 들어 있다. 사실인즉 굳이 냉전시대의 알레고리에 집착해 열편 영화의 순수한 즐거움을 잃어버릴 필요는 없다. 요즘 세대에겐 B급 SF영화의 유치함과 진부함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는 맛이 더 클지 모르며, 현대 SF영화에 영향을 끼친 장면들을 찾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봐도 상당히 위협적으로 보이는 미술, 특수효과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정성들여 만든 효과들에서 손의 질감이 전해진다. 낯익은 배우라곤 나오지 않는 영화들이지만, <타란툴라>의 마지막 장면에는 현재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이자 배우인 남자가 잠깐 등장한다(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과 싸우는 인간들의 정신적 공황을 다룬 열편의 영화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낙관적인 결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시민, 과학자, 의사, 언론인, 경찰, 군인은 놀랍도록 건강한 존재들이어서 잭 피니가 <바디 스내처>의 마지막 장에 써놓은 각오- 광대한 우주 그 어디에서도 우리를 패퇴시킬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를 기억하게 한다. 현실의 혼탁한 세상도 그렇게 명확하면 좋으련만. DVD는 B급영화라는 선입견이 무색할 정도로 근사하게 복원된 영상을 수록했다. 절판돼 고가에 거래되던 세트가 다섯 영화를 더 갖췄고, 가격마저 저렴하니 구입을 망설일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