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이 하 수상하다. 미국 쇠고기 수입을 알리는 장관 고시가 발표되자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안 그래도 뜨겁던 촛불집회가 활활 타올랐다. 주말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한 이즈음에 소설가 김훈이 한겨레신문사에 근무하던 시절 <씨네21>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지면에 썼던 글이 생각난다. ‘기브 미 초콜릿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2002년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사건에 관해 쓴 것이다. 유년 시절 미군한테 얻어먹은 초콜릿 맛을 잊지 못하며 DDT 냄새에서 문명을 경험했다고 고백하는 김훈은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한국은 이미 나처럼 DDT 콤플렉스에 젖은 세대의 나라가 아니라, 초콜릿을 얻어먹은 적이 없는 새로운 세대의 나라인 것이다.” 효순·미선이 때와 마찬가지로 연일 벌어지는 미국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역시 대한민국이 새로운 세대의 나라임을 보여주고 있다. 10대들이 촛불을 들자 배후에 반미좌파가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기브 미 초콜릿’의 기억이 없는 그들에겐 안 먹힌다. 미국한테 잘 보이는 게 길이라고 말하는 어른들만 바보가 되고 있다.
이번 촛불집회의 동인 가운데 하나가 민족주의라는 것을 부인하긴 힘들다. 대통령의 부도덕한 내각 인선 혹은 삼성 비자금 수사의 어이없는 마무리에도 잠잠하던 국민이 미국 쇠고기 수입에 흥분한 걸 보면 말이다. 처음 촛불집회가 시작됐을 때 마음 한구석에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그래서다. 이러다 여론의 뜻을 받들어 재협상하겠다고 하면 대통령 지지도는 치솟고 다수당의 입지는 오히려 탄탄해지겠구나 싶었다. 87년 6월항쟁 결과 노태우를 당선시킨 패배의 경험을 기억하는 나는 이번 촛불집회가 이명박 정부의 대미 협상력을 높여주는 정도에 그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물론 예측은 빗나갔다. 실용정부는 예상보다 강직했고 생각보다 멍청했다. 국민의 요구에 귀막고 끝까지 미국과의 신의를 지킨 대통령을 향한 야유는 이제 온 국민을 투사로 만들고 있다. 먹고살기 힘들어서 웬만하면 참고 살려던 사람들을 거리로 몰아세운 것이다.
이제는 민족주의가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지금 국민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느낀다. 쇠고기 협상 이후 보여준 온갖 거짓말이 국민을 바보로 본 결과임을 깨닫고 있으며 아무리 외쳐도 듣는 시늉조차 안 하는 모습에 자존심에 결정적 상처를 입었다. 국민을 무지렁이로, 쓰레기로 취급하는 정부의 태도가 굴욕적 협상에 상처입은 이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만든 것이다. 광우병 쇠고기는 안 되지만 한-미 FTA나 대운하는 면밀히 경제성을 따져보자던 사람들마저 등을 돌린 정권. 아무리 국회 다수당이 된다 해도 국민의 80%를 적으로 만들고서 뜻을 이룰 것 같지 않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다이내믹 코리아의 힘인 것 같다.
P.S. <씨네21>에 새로운 식구가 들어왔다. 장영엽 기자는 우리가 2년 전에 주최한 대중문화 전문기자 강의를 통해 <씨네21>과 인연을 맺은 뒤 객원기자 활동을 거쳐 정식기자로 일하게 됐다. 공개 채용 시험도 보지 않고 들어온 신입기자의 글솜씨가 궁금하다면 이번호 기획기사인 ‘독립영화제작 워크숍 따라잡기’를 보시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