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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아임 낫 데어>

요즘도 어린이에게 위인전을 많이 읽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린 시절 위인전을 읽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배우며 자랐다. 위인전집은 당시 어린이가 있는 웬만한 집에 한질씩 꼭 있었고, 그러다보니 커서 어떤 사람이 될래라고 물으면 나오는 답도 그 집에 있는 위인전집의 인물 가운데 하나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만인이 칭송할 만한 인물의 모범적 삶을 닮았으면 하는 부모의 바람이 생각대로 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위인전에 없는 많은 사람을 알게 되고 나의 재능이 책 속의 인물들과 다른 것에 좌절하기도 하며 더러 위인전이 사기를 쳤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황우석 박사의 전기처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뒤통수를 맞았던 예는 극단적이지만 나폴레옹이나 칭기즈칸 같은 정복자를 찬양하는 경우도 관점에 따라 배신감을 갖게 만든다. 그런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정도라면 도움은 될 텐데 대체로 위인전이 노리는 바는 단순한 사실 전달만이 아니다. 위인을 닮고 싶게끔 교훈을 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위인전을 찾기 힘든 만큼 아무 위인전이나 무조건 어린이에게 많이 읽힐 책인지는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어린이용 위인전이 아니라도 많은 전기들이 독자에게 어떤 교훈을 전할 것인지 골몰한다. 독자들 또한 책을 덮었을 때 뭔가 배우는 바가 있는 전기에 혹하게 마련이다.

전기는 대체로 한 인간의 삶을 알았다는 느낌을 준다. 잘 쓴 전기일수록 상세하고 풍부하게 그 인물의 초상을 제시한다. 하지만 어떤 전기 작가라도 부딪치는 문제가 있다. 책을 읽는 독자에게 뭔가 인과관계를 설명해야 하고 그 인물의 삶을 꿰뚫는 논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은 전기도 있겠지만 독자의 기대가 그러한 이상 탄탄한 드라마가 없는 전기가 주목받긴 힘들다. 전기영화를 만드는 일도 비슷할 것이다. 애초에 실존 인물의 삶에서 드라마를 발견해서 그걸 영화로 만드는 것이 대부분인 만큼 그 인물의 행동은 어떤 식으로든 납득이 되게 그려진다. 하지만 정말 전기물의 묘사처럼 그 인물이 일관된 논리로 살았을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인과관계가 분명할수록 이야기는 뻔해지기 쉬운데 작가나 감독이 미리 만들어놓은 드라마의 틀에 인물을 끼워맞추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전기물이 갖는 이런 한계를 <아임 낫 데어>는 전에 없던 방식으로 돌파한다. 밥 딜런 없는 밥 딜런 전기영화 혹은 밥 딜런에 관한 추정으로 만든 밥 딜런 전기영화. <아임 낫 데어>는 구스 반 산트가 인과관계를 설명하지 않는 영화를 만든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미국영화의 진화를 보여준다. 밥 딜런의 생애를 인과관계에 맞춰 나열하는 대신 그의 음악이 공명했던 시대와 공기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아임 낫 데어>는 드라마 <스포트라이트>로 화제가 되고 있는 기자 세계의 은어에 따르면 ‘야마’가 없는(실은 잘 안 보이는) 영화다. 야마가 없다는 건 무엇에 대해 어떤 입장으로 쓰는지 한눈에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얘기로 특히 신문에선 데스크의 호통을 들을 일이다. 밥 딜런에 관한 기사를 <아임 낫 데어>처럼 쓰면 십중팔구 “그래서 밥 딜런이 언제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건데”라며 따지고 들 것이며 “지금 예술하냐”는 힐난을 들을 것이다. 물론 신문 기사와 영화는 다르며 신문 기사나 전기로 표현할 수 없는 모호함과 뉘앙스를 드러낼 때 그것은 좀더 영화적인 표현으로 규정된다. 성숙한 영화적 표현인 <아임 낫 데어>는 신문 기사가 아니라 “지금 예술하냐”고 말할 때의 그 예술이다. 드라마의 논리를 버리고 정서와 분위기로 공감하는 전기물. 이 영화에서 당신이 어떤 메시지나 교훈을 얻지 못했다면 당연하다. <아임 낫 데어>의 좋은 점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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