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유가휘는 꽤 알려진 이름이 됐다. <킬 빌>에서 ‘죽음의 88인회’ 빡빡머리 두목, <킬 빌2>에서 백발의 사부 ‘페이 메이’로 출연시키며 타란티노는 그를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홍콩영화계에서는 과거 ‘소림사’ 장르의 단골 주인공이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한국에서 장미희와 함께 출연한 쿵후영화 한편이 있다. 1981년 <취팔권광팔권>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소림취팔권>으로, 당시 성룡이 출연한 <취권>(1978)의 엄청난 인기에 편승해 유가휘가 어설프게 취권을 구사하는 영화였다. 성룡처럼 표정연기가 되지 않고, 취한 리듬을 잘 살리지 못하는 그가 취권을 구사해 마음만 아픈 영화였다. 여기서 장미희는 유가휘가 복수를 꿈꾸는 악당의 딸로 출연해 이루지 못할 사랑에 몸서리쳤다. 장미희 외에 요즘 단골 할머니 역할로 입지가 탄탄한 김지영 선생님 역시 어린 유가휘의 어머니로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충(유가휘)은 당랑문의 장문인 왕(김영일)의 딸(장미희)을 다짜고짜 납치한다. 어렸을 적 왕으로 인해 형을 잃고 어머니가 자살한 기억을 갖고 있는 그가 딸을 인질로 삼아 복수를 하기 위해서다. 과거 홀로 버려졌던 충은 스승(현길수)으로부터 취권을 전수받아 복수의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성인이 된 충은 그렇게 당랑문의 고수들을 하나둘 제압해나간다. 그런데 충은 인질로 잡고 있던 딸이 원수의 자식임에도 미모에 반해 사랑을 느끼고 만다. 복수와 애정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지만 결국 복수를 택한다.
역시 눈길이 가는 건 장미희 선생님이다. 1981년 김효천 감독의 <김두한형 시라소니형>과 김호선 감독의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사이에 출연한 작품이니 1970년대 말 이후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의 영화다. 그런데 인질로 잡혀 두손이 묶인 채로 너무 오래 붙잡혀 있다보니 옷을 입은 상태에서 소변을 볼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장면도 있다. 그러고 보면 영화 역사상 그 수많은 인질신을 보면서도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문제(거동이 불편한 인질의 용변문제)를 환기시켜준 혁명적 장면이기도 하다. 유가휘는 그런 그녀를 물에 빠트려버리고 갑자기 평화롭게 선녀처럼 웃옷을 벗고 목욕을 하기 시작한다. 원수 사이를 망각한 그들은 곧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유가휘와 장미희의 가벼운 정사신도 포함돼 있다.
영화는 ‘한국을 중국처럼’ 촬영한 한·홍 합작 영화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식 창호지문이 뻔한데도 그걸 열고 나오는 건 치파오를 입은 여자고, 해인사나 불국사를 연상시키는 사찰들이 버젓이 당랑문의 본거지로 나온다. 당시 정통 무술에 기반한 영화들로 승승장구하던, 유가휘의 형이기도 한 유가량 감독의 무술영화들은 성룡으로 대표되는 ‘퓨전’ 쿵후영화들에 밀리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어처구니없게 제목으로라도 ‘절’(소림)과 ‘술’을 접목시킨(물론 ‘충’은 스님이 아니고 감독도 유가량이 아니다) 이런 영화가 한국에서 촬영하게 됐다. 심지어 수련장면의 경우 이전 유가휘 영화들의 일부 장면이 짜깁기돼 함께 섞여 있기도 하다. 홍콩 소림사 영화의 퇴조와 새로운 스타일의 등장, 그리고 그것을 뒤늦게 복제품처럼 양산하던 당시 한국 B무비 저개발의 기억이 어지럽게 뒤엉킨 풍경이 바로 거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