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외신기자클럽 동료 아드리안 공보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신화”와 상대적으로 짧았던 지속 기간에 비해 프랑스 밖에서 그리고 영화사에서 오래도록 계속해서 숭앙받고 있는 것에 관해 썼다. 그가 지적했듯이 다른 나라들- 미국, 영국과 일본 등- 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문화적 변혁을 겪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영화 장비와 필름 스톡 등) 영화산업의 기술적 변화들 덕택이었으며, 또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맞게 된 사회적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사실 모든 뉴웨이브는- 모든 혁명들처럼- 그것을 태동시킨 힘이 무엇인가, 그리고 결국 어떤 내부적, 외부적 힘에 의해 잠식되었는가 하는 면에서 모두 다르다.
과거 50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나타난 많은 뉴웨이브 운동 중 몇몇을 나는 꽤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새롭게 뉴웨이브 운동이 일어나던 그 나라들을 우연히도 계속 방문하게 되면서.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에 나타났던 세 중국어권 영화들이 그들이다. 첫 번째로 1979년에 시작된 홍콩 뉴웨이브, 두 번째로 1982년에 시작된 대만 뉴웨이브, 세 번째로 1983년에 시작된 중국 뉴웨이브.
홍콩 뉴웨이브는 서극, 허안화, 임호 등 사실주의 시리즈 <사자 바위 아래>(Beneath the Lion Rock) 같은 TV드라마를 만들던 일군의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1979년을 대개 그 기점으로 삼는다. 그들의 초기작들은 최근의 다른 뉴웨이브 영화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건조한 “아트영화”가 아니라, 새 옷으로 갈아입고 새로운 연기 스타일을 선보이는 상업영화들에 더 가까웠다.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동지애가 있었고 그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대만 뉴웨이브는 마침 그때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 감독들에 의해 싹텄으며 좀더 급진적으로 기존의 대만영화들을 부정했다. 흥미롭게도 스타일 면에서 가장 급진적인 발전을 보인 감독은 유일하게 외국에서 영화공부를 하지 않고 현지 영화산업에서부터 시작했던 허우샤오시엔이었다. 허우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이 대표주자가 된 한편, 지금은 거의 잊혀졌지만 그외에도 많은 좋은 감독들- 진곤호, 증장상과 장의- 등이 있었다. 3~4년 뒤 대만 뉴웨이브는 곧 개인들간의 분쟁으로 분열되어버린다. 중국 뉴웨이브는 여전히 선두주자로 알려져 있지만, 더이상은 친구가 아닌, 두 사람- 첸카이거와 장이모- 에 의해 시작되었고 베이징영화학교의 제5세대 학생들로부터 나왔다. 이들은 외국에서 공부하지 않았지만 당시 영화학교에서 미국 고전영화들을 섭렵했다. 대만의 뉴웨이브 감독들처럼 이들은 초기에는 정치적인 제한 속에서 작업했으며, 그들의 동지애는 강했고 80년대를 관통하며 지속되었다.
때때로, 80년대 홍콩에서, 세 뉴웨이브 운동의 감독들이 만나서 서로를 비교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하더라도) 하나의 중국 문화를 공유하였으나 그뿐이었다. 그들의 각개의 “저항”은 무척 다른 결과를 낳았다. 대만의 영화산업은 90년대 극단적인 아트하우스 영화로 수그러들었으며, 홍콩 뉴웨이브는 주류산업에 완전히 잡아먹혔고, 중국은 제5세대와 함께 성장했던 다소 혼돈스러운 “제6세대”로 분열되었고 그들은 아트하우스 영화로부터 등을 돌렸다.
유럽에서와 달리 중국과 대만의 뉴웨이브는 사회적인 변화를 반영하기보다 그 변화들을 예기하며 앞당기려 했다. 홍콩에서는 뉴웨이브 감독들에게 어떤 사회적, 정치적 목표도 없었다. 그리고 모두 결국은 개인간의 경쟁보다는 경제적인 현실에 잡아먹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