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그러니까.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열흘 동안 분명히 전주에 다녀왔는데 기억나는 것이 없다. 하나도 없다면 거짓말일 테고 조각조각 떠오르기는 하는데 선명한 것은 없고 모두 몽롱하게 기억의 뒤안길을 서성이는 기분이랄까. 오히려 그때 기억을 되살리려 할수록 무심하게 깜빡이는 모니터의 커서가 괘씸할 지경이다. 651호 ‘편집장이 독자에게’에서 전주영화제 데일리팀을 향한 로비 의혹까지 받은 나로서는 딱한 일이다. 가고 싶다고 해서 다녀온 영화제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 희미하니 말이다.
변명을 하자면, 전주로 떠나기 전부터 적신호를 보내던 나의 정보처리시스템 탓이다. 문제는 그 신호를 제때 발견하지 못하고 방치한 건데, 컴퓨터처럼 메모리를 활용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집어넣기만 한 것이 화근이었다. 영화제 시작 전 프리뷰를 위해 영화를 10편 정도 봤는데, 그중 반이 비디오에 테이프 엉키듯 머리 속에서 꼬여버렸다. 발단은 <스트레인저: 무황인담>과 <사이드카의 개>였다. 일본영화라는 걸 제외하면 장르까지 다른 두 영화는 어른-아이 콤비가 등장한다는 캐릭터 구도와 말타기와 자전거 타기를 알려주며 둘 사이가 가까워진다는 비슷한 에피소드 때문이 섞이기 시작했다. 뭘 탄다는 게 그렇게나 인상적이었는지 말-자전거-오토바이로 이어지는 탈것들의 향연은 급기야 전위적인 실험영화의 형식으로 편집되더니 제멋대로 상영까지 됐다. 머리 속이 그 사태가 나고보니 응급처치가 필요했다. “보고, 쓰고, 잊는다”는 원칙은 행동수칙 1호가 됐고, 어떤 정보도 그 순간이 지나면 머리 속에 남지 않았다. 남들 다 하는 일 나만 한 것처럼 생색내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다. 그래도 머리 속에 지우개가 들어선 이유를 찾으려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언제나 잔류물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육하원칙에 의거한 상황보다는 그 순간 느꼈던 감정에 가까운 형태로 남았다. 통역없는 인터뷰를 정리하다가 영어로 오가는 대화의 줄을 놓쳐 아득했던 추락의 감정과 완고한 인상의 일본 감독이 살짝 미소지었을 때의 안도감이 그것일까. 직접 만난 벨라 타르 감독에게 가졌던 경외심이나 <독일의 가을> 상영 전 친절하고 상세하게 영화를 설명하는 평론가 울리히 그레고르에게 솟았던 호감도 그 연장선에 놓고 싶다. 감정의 절정은 <우린 액션배우다>를 본 저녁이었다. 데일리팀 전원이 마감으로 바쁠 시간에 한가로이 영화를 봤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끝나기가 무섭게 사무실로 돌아왔지만, 한켠에는 ‘다찌마와리’까지 선보였다는 GV를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날 나는 숙소를 나눠 쓴 선배에게 순진하게 “혹시 영화제의 즐거움은 이런 기분이 아니냐”며 묻기도 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영화제의 즐거움은 남들보다 조금 먼저 소문내고픈 영화를 만나는 기쁨에 있지 않을까.
다 쓰고 보니 기억 안 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 됐다. 남들이 쓴 첫 데일리 후기를 읽으면 감동적이기도 하고(장미) 아름답기도 하던데(최하나) 난 왜 이리 엉성한 걸까. “졸라서 보내줬는데 재밌냐”고 물으시던 편집장과 “재밌다”는 대답을 은근하게 강요하시던 취재팀장에게 이 자리를 빌려 “전주에 있을 때는 음식 맛있는지 몰랐어요. 하지만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전주 음식은 맛있었어요”라고 하면 대답이 될까. 설마 음식 대신 취재를 넣어 직역하지는 않으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