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무슨 똥배짱들이야!” 1961년 1월5일. 결국 파업을 강행한 성우들의 고집 앞에서 조흔파 서울중앙방송국장은 미쳐 나자빠질 심정이었다. 방송국쪽에서 ‘사례금 100푸로 인상’을 타협안으로 제시했지만, 성우들은 곱절을 더 달라는 애당초 요구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출연 거부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다. 그동안 성우들의 출연료가 제자리걸음을 한 건 “방송국의 성우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오는 것이며 이는 예술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서울중앙방송국출입성우 대우개선추진위원회’의 주장은 근 4년 동안 작가와 연출료 인상이 두 차례 이뤄진 만큼 성우들 또한 동등한 대접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골든 아워’에 연속극을 듣기 위해 모였다가 라디오에 애꿎은 매질을 가하고 있을 수십만 청취자가 떠올랐지만, 조 국장 또한 순순히 물러설 수 없었다. “국가예산 한도 내에서밖에 움직일 수 없는 당국으로서… (중략)… 만일 이 타협안이 수락되지 않고 그들이 끝끝내 출연하지 않는다면 다른 ‘푸로’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성우들의 집단 파업은 사실 예견된 일이었다. 1950년대 말부터 불기 시작한 라디오 방송극 붐은 몇몇 인기 성우들을 ‘스타아 뒤의 스타아’로 만들었다. 참고로 1961년의 갈등은 “청취자를 볼모로 삼는다”는 비난 속에 성우들이 ‘출연료 100% 인상’이라는 방송국의 타협안을 이틀 만에 받아들이면서 마무리됐다. 그러나 ‘메이크업 없는 스타’로 불리며 기존 배우들을 ‘벙어리 스타’로까지 만들 정도의 인기가 없었다면 성우들이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는 용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얼마 뒤 성우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건 다름 아닌 충무로였다. 한국영화 제작편수가 급격히 늘어났던 1962년, 성우들 또한 황금방석에 앉았다. 1년 전만 하더라도 처우개선을 요구했던 성우들이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됐다. 당시 방송국의 잘나가는 아나운서의 월급이 약 5만환. 반면 프리랜서 성우들은 30분짜리 프로그램 사회를 보는 것만으로도 2만환의 사례비를 챙겼다. 게다가 “촬영시에 동시녹음을 하지 못하는 영화계의 약점으로 말미암아” 성우 중에는 “월수 50만환은 거뜬히” 거두는 ‘금성’(金聲)까지 출현했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성우 인력이 부족했던 탓에 영화배우들이 방송사를 드나들었으나 1960년대 들어서 상황은 역전됐다. 1962년 서울과 지역에서 활동하던 성우의 숫자만 200여명. 이혜경, 남성우, 신원균, 오승룡, 주상현, 고은정, 유병희 등 당시 일급 성우들은 특히 선망의 대상이었다. 1963년 동아방송은 성우강습생 약간명 모집 공고를 냈는데, 접수 결과 무려 1796명이나 몰려들었다. 엄앵란은 고은정, 장동휘는 오정환 하는 식으로 배우와 성우 사이에는 ‘단골’ 계약이 맺어지기도 했는데, 녹음기사 이재웅씨는 성우들 총책임자가 도급을 맡아 후시녹음 일을 나눴을 정도로 호황이었다고 덧붙인다. 바늘 가는데 실이 따로 놀 수 있나. 한해 많게는 40, 50편에 출연했던 가케모치 배우들의 시대, 제작자들은 배우뿐 아니라 “성우 잡으려고도 칼부림을 벌여야 하는” 처지였다.
배우와 성우의 합체(?)는 안에서는 기술 낙후를 만회할 더없는 협업처럼 느껴졌을지 모르지만, 바깥 시선은 그처럼 관대하지 않았다. “나는 한국말을 잘 못 알아듣기 때문에 뉘앙스를 캐치할 도리는 없지만, 그래도 이 장면에선 저렇게 큰 목소리가 나올 턱이 없을 텐데, 사운드가 대성으로 절규하고 있는 것을 몇번이나 보고 들었다.” 1964년 한국을 방문한 오시마 나기사는 “한국영화는 왜 그리 비를 많이 뿌리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성우들의 대리녹음’이야말로 한국영화를 후퇴시키는 주범이라고 지적한다. 배우는 목소리가 없으니 ‘오버 액션’을 하고, 성우는 목소리만으로 표현해야 하니 ‘오버’한다는 것이다. “그냥 슈팅 들어가는 거야. 아니면 아닌 거고.” 당시 1차 편집한 필름을 보며 배우와 입을 맞추는 성우는 거의 없었다. 낮에는 방송국으로 밤에는 영화 녹음실로 행차했던 성우들은 대본을 미리 받아 예습을 하더라도 화면 속 배우들의 우물우물한 입모양만으로 대사를 집어넣는 데 애먹을 수밖에 없었다. 대개 녹음 일정은 이틀이나 사흘. 촉박한 일정 속에서 감독 또한 대사와 말이 어긋나는 줄도 모르고 곯아떨어지는 일이 적잖았다.
충무로 또한 세간의 비난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1963년 대종상 심사위원회는 연기심사에서 “성우가 녹음한 경우에 감점키로 한다”는 규정을 만든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가 감점 대상이니 이 같은 ‘패널티’가 먹힐 리 없었다. 한국영화의 우스운 복화술은 1970년대 들어서도 계속됐다. 고 하길종 감독이 <수절> 후반작업을 할 때 “‘웨웨웨웨’ 하는 식의 똑같은 소리”가 싫다면서 무려 열닷새 동안 성우들에게 ‘리얼한’ 목소리 연기를 내달라고 들볶자 성우들이 집단 반발하며 녹음실을 뛰쳐나가기까지 했다. 1970년대 말부터 정진우 감독이 일본에서 들여온 동시녹음 카메라로 생생한 목소리를 따려고 시도했으나 남의 목소리를 빌려 쓴 배우들의 버릇을 고치기란 쉽지 않았다. 목소리 대출에 길들여졌으니 카메라 앞에서 제소리를 낼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