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영화 <청춘의 십자로>
‘가장 귀여운 노력의 결정.’ 1934년 박승걸이 <조선중앙일보>에 <청춘의 십자로>를 보고 평한 것이다. “조선 영화는 얼마나 잘된 것을 보러가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못된 것을 보러간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을 때 나온 안종화 감독의 <청춘의 십자로>는 당시 평단의 주목을 끌었다. 금강 키네마사 제1회 작품이다.
“안종화씨 감독, 이명우씨 촬영으로 제작된 금강 키네마의 <청춘의 십자로>가 21일부터 조극(朝劇)에서 상영하게 되었는데 스토리는 굴곡이 적으나 출연자들의 연기와 촬영수업이 제 길을 들어선 셈이다. 물론 부분적으로 따져보면 쳐들 말이 많지만, 이 영화에서 영화배우다운 몇 사람을 찾아낼 수 있음이 기쁜 일이다. 김연실양은 이제야 영화라는 것을 안 것 같고 초출연의 박연씨의 역은 그를 출세시킬 기틀을 만들었고 후편에 있어서 이원용씨는 열연이었고 안종화씨의 감독 수법이 앞으로 가경에 들어갈 수 있음을 미루어보게 하며 이명우씨의 촬영은 고심한 자취가 많다.” <조선일보> 1934년 9월21일자 기사다.
2006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가장 오래된 조선 영화로 <미몽>을 상영했다. 1936년 작품이다. <청춘의 십자로>는 이보다 2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최고(最古)의 영화의 시기가 조금씩 더 뒤로 미루어지고 있다. 조선 영화 중 최고(最高)의 작품이라고 일컬어지는 나운규의 <아리랑>(1926)이나 그에 버금가는 호응을 얻은 이규환의 <임자 없는 나룻배>(1932) 등이 가장 오래된 영화로 한국영상자료원을 찾기까지는 ‘조선 영화’에 대한 극심한 갈망과 굶주림이 채워지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영화의 기록이 1936년에서 34년으로 앞당겨지는 것을 보는 것은 연구자로서는 큰 기쁨이다. 5월9일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 상영과 변사 공연을 시작으로, 한국영상자료원이 개관영화제를 연다. 정기탁의 <상해여 잘 있거라>(1934)도 나의 기대작 리스트에 있다. 영상자료원 김한상씨의 도움으로 <씨네21> 독자들을 위해 <청춘의 십자로>를 미리 보았다. 조선 영화 중 무성영화를 본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자막, 인터타이틀이 없는 무성영화를 본 것도 처음이다. 시나리오도 남아 있지 않다. 변사 공연이 있는 5월9일, 10일이 기다려진다.
영화 형식상으로 보면 서사적으로는 신파며 시각적으로는 모던하다. ‘늙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두고 고향을 떠나는 영복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성품이 우직한 영복은 일찍이 봉선네 집 데릴사위로 들어가 7년 동안을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했으나 결국은 주명구에게 봉선을 빼앗기고는 마을이 싫어져서 이렇듯 고향을 등지고 떠나가는 것이었다… (중략) 결국은 어느 주연 자리에서 개철과 주명구 일당을 찾아내어 죽을힘을 다하여 그들을 상대로 일대 격투가 벌어진다. 언제나 정의의 편이 이기듯, 영복은 영옥을 비롯해 영희의 가솔까지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역시 신파란 활극과 정의의 승리!
시각적 면에서는 아찔하다. 처음 카메라는 터널을 통과해 기찻길을 보여준다. 기차는 도착하고 서울역의 정경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역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군중은 그림자와 실체로 사라지고 부각되며, 역사 건축물의 계단과 기둥은 그래픽한 조형을 만들어낸다. 이런 식민지 경성의 근대 풍경 속으로 영복(이원용)의 얼굴이 미디엄 숏으로 보인다. 나중에 알려지는 바, 그는 서울역의 ‘아까보오’, 수하물 운반부다. 그는 기차에서 무거운 짐을 내린 모녀처럼 보이는 두 여자를 도와준다. 이후 그의 회상으로 영화는 농촌에서 노동을 하는 영복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노동의 과정과 농촌 마을의 일상을 정교하고 적요하게 보여준다. <조선일보> 1934년 9월28일자 평문에서 이규환은 이렇게 농촌의 모습을 촬영한 이명우, 손용진의 촬영을 언급하면서 ‘풍경이 가려한 조선 농촌의 정서와 정조와 면목을 스크린에도 흘려놓은 양 기사의 촬영술’을 높이 칭찬하고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기차의 움직임이 미적으로 그려진 것처럼 농촌에서는 연자방아의 움직임이 잘 포착되고 있다. 민속지적 영화처럼 카메라는 농촌의 생활과 노동 현장을 트래킹과 패닝숏으로 보여준다. 러시아 도브첸코가 농촌을 담아내는 방식을 연상시킨다. 남자들은 모여 앉아 담배를 피우고, 여자들은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빨래를 한다.
다시 도시로 오면 남자는 면도 도구를 격식있게 갖춘 채 면도를 하고 여자는 바에서 담배 연기를 뿜는다. 그 남자들은 서양풍의 근사한 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담소를 한 뒤 골프를 치기도 한다. 차가 주유소에 도착하면 한 여자가 기름을 넣어준다. ‘가르고니’(Gargony)라는 사인이 보인다. 그녀가 배우 김연실로 예의 수하물 운반부 영복과 친한 사이다. 당시의 평은 그녀를 ‘개솔린 걸’이라고 소개하면서 연기의 기량을 칭찬한다. 이렇게 평행을 달리던 도시와 농촌은 이후 이중 노출 형식을 통해 도시와 전원화 된 자연이라는 모던 보이와 걸의 이중 공간의 평행으로 자리바꿈한다. 이들은 레저를 향유하면서도 권태를 내뿜는 유한계층의 제스처를 만들어낸다. 주명구와 개철 등이다. 프레임을 살짝 비운 채 인물이 들어오는 프레임 인 형식이 이런 유한계급의 하릴없음을 시사한다. 시골에서 올라온 영복의 동생 영옥(신일선)은 카페의 여급이 되어 개철에게 당하고, 개솔린 걸 영희 역시 직업을 잃은 채 주명구와 개철 일행에게 당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강조되는 표정은 이러한 상황에 분노를 느낀 영복의 얼굴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다. 그러나 배우 이원용의 이러한 화난 모습은 <아리랑>의 나운규의 성격 묘사와 비교되면서 큰 평가를 얻어내지는 못한다.
<청춘의 십자로>라는 제명이 단번에 알려주듯 이 영화는 상처에 민감하고 부서질 듯한 청춘들이 험한 노동과 성적인 착취를 당한 뒤 자각을 통해 삶의 경로를 찾아가는 과정을 도시와 농촌을 넘나들며 보여준 뒤 농촌의 가치를 인준하는 방식으로 끝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영화의 끝 시퀀스, 이들에게 기독교적인 축복을 내려주는 장면이다. 알려진 대로 일제강점기, 기독교는 <집 없는 천사>라는 영화에서도 조선과 일본이라는 식민과 피식민이라는 양자 구도를 넘는 어떤 대안적 지표로 종종 등장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표현의 갑작스러운 과잉이라고 할 만큼 과장된 태도를 지니고 종결 시퀀스를 완성시킨다.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트리고 세상에 소리를 친 우리의 영화” <청춘 십자로> 등 일제강점기의 ‘조선 영화’들이 발견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조선 영화 아카이브, 사료 보관소의 선반은 많이 비어 있다. 한국영화 연구자 정종화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의 완본에 가까운’ 조선 영화(극영화)는 <미몽> <반도의 봄>을 비롯해 12편 정도다. 그래서 이제 더이상 텅 빈 것은 아니지만 아직 다소 퀭한 식민지의 아카이브를 놓고 나는 탈식민 연구의 자장 속에서 좀더 근본적으로 영화사 기술의 문제를 제기해보려고 한다. 20세기가 막 시작되는 1901년 <황성신문>의 한 기사로부터 시작해보자.
2. 보이지 않는 영화 혹은 원초경
1901년 9월14일 <황성신문>에는 “사진활동승어생인활동”(瀉眞活動勝於生人活動), 즉 “활동사진이 사람활동보다 낫다”라는 내용의 글이 실렸다. 이 신문기사는 활동사진이 도입되던 초창기, 조선의 한 식자가 활동사진을 “촬영한 그림인 사진이 배열되어 움직이는 것이며 활화”라고 정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이루는 요소들로 “그림, 촬영(이상 활화), 사진, 배열, 움직임”을 들고 있으며, “촬영한 그림이 몸(?)이 되고 전기가 그것을 움직임으로써 활동하게 되는 것”이라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거기에 초창기 영화 관객의 반응을 “사람들이 활동사진을 보고 신기함에 정신이 팔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참으로 묘하다고 찬탄하여 마지않는다”라며 경이감으로 묘사하고 있다.
‘활화’에서의 ‘활’은 조선 초창기 영화 문화에 대한 암시적 언급으로도 읽히는 <취화선>의 중요한 토픽이기도 하다. 영화 <취화선>이 다루고 있는 시대는 조선에서 초창기 영화 문화가 시작하는 지점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 <취화선>의 끝 자막은 장승업이 1897년에 죽었다고 전한다. 같은 해 1897년 10월10일을 전후로 해 활동사진이 조선에 들어온다. <런던타임스> 1897년 10월19일자 보도 기사는 다음과 같이 그 소식을 다룬다. “극동 조선에서도 어느새 활동사진이 들어왔다. 1897년 10월 상순경 조선의 북촌 진고개의 어느 허름한 중국인 바라크 한개를 3일간 빌려서 가스를 사용하여 영사하였는데, 활동사진을 통해 비쳐진 작품들은 모두 불란서 파테 회사의 단편들과 실사 등이 전부였다.”
<취화선>에서 <한성신보>의 일본인 기자 카이우라는 장승업에게 조선 왕조가 몰락하고 있고, 이제 선생의 그림만이 조선 사람들에게 희망이라고 말한다. 진경과 대조적으로 선경으로 분류되는- “뭇 백성이 기댈 만한 곳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경이 아닌 선경으로 그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면 그 또한 환쟁이들 천명이 아니겠습니까?”- 장승업 그림의 이러한 쓰임새는 사실 조선에 곧 도착할 영화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보다는 환상이 투사된 재현 체계로서의 영화의 전사(前史)가 장승업의 “선경”을 통해 기술되는 셈이다. 또 장승업은 검은 수석을 제자에게 보여주면서 죽어 있는 돌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돌, 활석을 그려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화사들의 눈에는 하찮게 나뒹구는 돌멩이도 살아 움직여야 하느니 돌 같은 미물도 살아 있으면 활석이요 죽어 있으면 완석이니라.”
움직임을 중요한 동력으로 삼는 활동사진이라는 매체의 활기와 활력을 연상시키는 인식이다. 이렇게 <취화선>에서 제시된 영화의 전사로서의 장승업의 판타지 그림 그리고 활석에 대한 강조를 참조하면서, 위의 <황성신문>의 기사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당시 활동사진이라는 재현 매체의 활동성(사람들이 영화에서 활동하는 것)을 당시 백성, 특히 대한(大韓)의 선비의 비활동성, 무력함과 비교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당시 제국들의 ‘열전’ 속에 무기력하게 방치된 조선의 상황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활동사진의 ‘활동’은 생동감과 대세를 만회할 수 있는 생민(生民)의 활동과 대비된다.
한편으로는 활동사진이 활발하게 소개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의 무기력이 공존하는 이 20세기 초, 활동사진의 이러한 활력이 ‘선진’ 외국의 풍물, 문화를 소개해 조선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는 ‘감상(만)의 시대’이던 시기를 넘어 조선의 문제를 다루는 창작의 시대로 진입하는 것은 1919년의 키노 드라마 <의리적 구토>다. 키노 드라마는 다음과 같이 홍보되었다. 이때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키노 드라마에 조선 배우가 활동한다는 것이다.
단성사주 박승필은 광고문을 통해 그 제작의도를 밝히게 되는데,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조선의 활동 연쇄극이 없어서 항상 유감히 여기던 바 한번 신파 활동 사진을 경성의 제일 좋은 명승지에서 박혀 흥행할 작정으로 본인이 5천원의 거액을 내어 본월 상순부터 경성 내 좋은 곳에서 촬영하고 오는 27일부터 본 단성사에서 봉절개관을 하고 대대적으로 상장하오니 우리 애활가 제씨는 한번 보실 만한 것이올시다.” -단성사주 박승필 근고, <매일신문> 1919년 10월27일자
김도산이 단성사 박승필 사장을 찾아가 연쇄극을 제작하자고 제안해 네편을 만들기로 하고, 신극좌 단원들과 함께 <의리적 구토> <시우정>(是友情) <형사의 고심>(刑事苦心) <오, 천명>(天命)을 만들었고 촬영은 미야카와 소노스케 일본 오사카 덴카쓰 기사를 고용했다. 필름이 유실되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 송산은 본시 부유한 집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모친을 잃고 계모 슬하에서 불우하게 자라난 몸이었다. 집안이 워낙 부유하고 보니 재산을 탐내는 간계로 말미암아 가정엔 항상 재산을 둘러싼 알력이 우심했다. 송산은 이리하여 새 뜻을 품되 이 추잡한 가정을 떠나 좀더 참된 일을 하다가 죽으려는 결심을 하는데 우연히 뜻을 같이 하는 죽산과 매초를 만나 의형제를 맺고 정의를 위해 싸울 것을 다짐한다. 한편 계모의 흉계는 날로 극심해 가서 드디어는 송산을 제거하려는 음모까지 모의하게 된다. 송산의 신변이 위태로워짐을 알게 된 의동생 죽산과 매초가 격분해서 정의의 칼을 들려 하지만 송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이를 말린다. 송산인들 어찌 고민이 없을까마는 그는 오직 가문과 부친의 위신을 생각해서 모든 것을 꾹 참고 견디자는 것이었다. 그러하자니 자연 마음이 울적하고 괴로운 송산은 매일 술타령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송산의 은인자중도 보람이 없이 드디어 최후의 날이 오고야 만다. 계모 일당의 발악이 극도에 올라 송산의 가문이 위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좌시할 수 없게 되자, 송산은 죽산과 매초의 독촉도 있고 해서 눈물을 머금고 정의의 칼을 드는 것이었다.”
조선 관객에게 ‘조선’의 문제를 두고 말을 거는 활동사진을 포함하는 키노 드라마는 조선 영화 생산의 첫장, 근대적 원초경이다. 이때 원초경이란 용어는 프로이트의 원초적 장면(Urzene, primal scene)을 전유한 것이다. 이때의 원초적 장면은 유년기에 해석한 엄마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 행위, 성폭행 그리고 부모의 성관계를 지칭하며 판타즘, 유혹 이론, 섹슈얼리티, 트라우마 등과 연관된다. 기억 속에 억압된 성적장면으로 유년 시절, 부모의 성교를 보고 그것을 아버지가 어머니를 거세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엄밀한 프로이트적 의미로 조선 영화의 ‘원초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장면을 경(鏡)으로 치환한 근대적 원초경은 사진과 함께 영화를 기계 복제 이미지라고 할 때 바로 그 기계 복제 이미지들로 구성되는 근대 시각장의 기원적 순간, 조선 영화의 첫장을 가리키는 포괄적 의미다.
한국영화의 기원이라는 표현보다 원초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우선 경(鏡), 거울이라는 시각적 영역을 가리킬 수 있으며 또 정신분석학에서 원초적 장면에 대한 구성이 “해석적 실행”의 장이며, 그 ‘구성된 이벤트의 존재론적 비결정성’이 라캉이 프로이트와 하이데거에 대한 텍스트 상호 독해에서 밝혔듯이, 정신분석에서 회상의 문제는 하이데거가 근원적 존재론을 향해 있는 사산된 프로젝트에서 마주쳤던 장애들과의 접점 속에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또, 데리다 역시 형이상학에 대한 추정적 극복을 향한 프로이트와 하이데거의 추동성은 회상의 문제와 동일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예컨대 원초적 장면의 치유적 힘을 주장하면서, 프로이트는 구성된 사건보다 회상된 사건을 더 가치 평가하는 통상적 지혜를 뒤바꾸려 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시도를 통해 당대적 해석의 프로젝트의 길을 열었다.
이렇게 해서 원초적 장면은 정신분석학만이 아니라 사건이라는 개념을 존재론의 지반에서 전치시키고, 존재적으로 미결정된 상호 텍스트적 이벤트를 의미하면서 역사적 기억과 상상적 구성, 아카이브적 진실증명과 상상적 자유 유희 사이의 특이 공간에 위치한다.
근대의 기원으로 돌아가 전복하는 계보학적 시도를 염두에 두면서 이러한 원초경의 특이 공간, 사이 공간을 해석하려고 한다. 원초경은 경(鏡)이며 경(境)계(界)이기도 하다.
특히 조선 영화의 기원 지점, 초창기 영화사에 이 원초경을 하나의 방법론이자 전망으로 도입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식민지 시기 영화들이 최근에 발견된 <미몽> <반도의 봄>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유실되었기 때문에 바로 “역사적 기억과 상상적 구성, 아카이브적 진실 증명과 상상적 자유 유희” 사이에 그 영화적 배열을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형용역설인 비/가시적 영화(In/visible cinema)로서의 조선 영화를 이론적, 역사적으로 가시화할 수 있는 방법론적 실마리로서 원초경을 설정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초창기 한국 영화사에 대한 논쟁은 주로 최초의 영화가 무엇인가, 최초의 상영관은 어디인가? 등 기원에 대한 강박, 집착이다. 식민지 시기 180여편의 영화가 제작되었으나, 1998년 전까지 한국영상자료원에는 일제강점기 시기 만들어진 조선 영화가 한편도 남아 있지 않았다. 1998년 Gosfilm archive에서 발견, 도쿄국립근대미술관 필름센터에서 한국영상자료원으로 옮겨진 영화들은 <심청> <어화>의 일부, <망루의 결사대> <젊은 모습> <사랑의 맹세> <군용 열차> <지원병> <집 없는 천사> 등이다. 이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영화인 <미몽>(1936), <반도의 봄>(1931) 등이 발견되었다. 조선 영화의 발견이 이루어진 뒤의 최근 연구인 김려실의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이화진의 <조선영화-소리의 도입에서 친일 영화까지>, 강성륭의 <친일영화> 등은 이 같은 강박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러한 조선 영화의 재출현은 이제 기존의 비가시적(invisible) 영화로서의 조선 영화와 ‘친일 영화’라는 뚜렷한 가시성을 가진 조선 영화 그리고 친일 영화나 반일 영화로 양분할 수 없는 모호한 경계에 놓인 영화들 사이의 대화적 역학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즉 퀭한 아카이브의 비가시적 영화들은 영화 매체가 주는 가장 근본적인 쾌락 중 하나인 절시증(scopophilia)을 이후의 연구자들이나 관객에게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특정한 종류의 지식욕(epistemophilia)은 기원에 대한 집착과 탐구를 좀더 강화된 형태로 발생시켰으나 이제 재등장한 영화들은 절시증과 지식욕을 새로운 방향으로 재형상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즉 친일 영화인가 반일 영화인가 하는 문제만이 아니라,‘조선 영화’의 ‘조선’과 ‘영화’의 절합을 이론화하고 동시에 해체하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3. 아카이브 , 영화의 보물창고 혹은 저주
최근까지 반복된 최초의 상영, 최초의 극장, 최초의 조선 영화, 기원을 찾는 연구는 사라진 영화, 텅 빈 아카이브에 대한 집착이기도 하고, 데리다가 비판하는 시작과 출발점과 기원들에 대한 서구적 강박의 재연이기도 하다. 아카이브의 아르케(Arkhe)는 시작(commencement)이기도 하면서 명령이다(commandment). 그래서 그 아카이브는 기원, 시작의 권력에 포획되어 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공문서는 치안 판사장의 처소에 보관되고 그는 공문서를 법질서를 위해 해석한다. 반면 식민지의 아카이브, 특히 영화 아카이브의 선반은 거의 텅 비어 있다. 그리고 이 텅 빈 아카이브를 ‘기원’에 대한 강박으로 채우려는 영화사가의 욕망이 있다.
세계적으로 보자면 무성영화의 2/3가 사라졌다고 하고, 제국 일본의 무성영화도 태반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필리핀의 영화사가 닉 디오캄포는 <아시아의 잃어버린 영화들>(Lost Films of Asia)라는 책의 서문에서 식민지 시기 잃어버린 아시아영화들의 행방을 물으면서 이 사라짐을 문화적 집단 학살(Cultural Genocide)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와중에도 식민시기 영화가 한편도 남아 있지 않았던 한국영상자료원의 98년 전까지의 사정은 극단적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영화, 텅 빈 아카이브를 기원에 대한 강박으로 채우거나, 연구의 막다른 골목, 불가능성으로 보거나, 기존 연구와 동일한 서사를 반복한다거나 하는 것을 지양하고,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경향들을 증후로 읽으면서 퀭한 식민지의 아카이브를 영화사 연구의 대안적 방법론을 찾는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생산적일 것이다.
이때 원초적 장면은 시작과 기원 출발지점을 가리키지만 다의미적 원초경은 그 강박을 거울마냥 성찰적으로 비추고(鏡) 기억과 상상적 구성, 아카이브적 진실 증명과 상상적 자유 유희의 경계를 횡단하고자 한다. 프란츠 파농이 지적하는 것처럼 식민화 시기 기존의 (전통적) 참조 체계는 흉포하게 무너지고 문화적 패턴을 강탈당하고 가치들은 무너지고 비워진다. 이러한 역사적 조건은 탈식민시기, 어떻게 참조 체계를 재구성할 것인가, 어떻게 아카이브를 통해 역사적 저장소를 만들고 사회적 기억을 구성해나갈 것인가를 좀더 당대적이며 역사적으로 절실한 프로젝트로 만들게 된다. 이때 아카이브는 “사료 보관소(자료원)일 뿐만 아니라 학문, 문화적 실천, 정치, 그리고 테크놀로지들이 교차하는 구조, 과정 인식들의 복합체다”.
이러한 아카이브, 한국에서 보자면 한국영상자료원은 예의 개관영화제를 기획하면서 ‘영화의 보물창고가 열린다’라는 배너를 웹사이트에 띄우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집단 학살, 망각된 영화들이 귀환하고 있다. 그것은 정말 되찾은 보물일까 아니면 이렇게 되찾은 영화들의 친일적 이데올로기에 망연자실한 연구자들의 반응을 헤아려 저주라고 할까? 일단 되찾은 영화들을 부지런히 보고 또 보고 논의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