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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오디세이] 40살에 핀 조앤 크로퍼드의 화양연화

조앤 크로퍼드(1906∼77)는 1930년대의 스타다. 메트로-골드윈-메이어, 곧 MGM의 사주인 루이스 메이어의 전폭적인 지지로 스타덤에 올랐다. 라틴 계열의 피가 섞인 그녀가 글로리아 스완슨, 그레타 가르보 같은 순백의 배우들과 경쟁하는 것은 사실 승산없는 싸움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크로퍼드는 30년대 들어 그레타 가르보와 더불어 MGM의 최고의 별로 떠올랐다. 루이스 메이어의 지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30년대 그레타 가르보의 라이벌

크로퍼드는 메이어의 지지를 얻기 위해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는 섹스에 관한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메이어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스타들과 별의별 염문을 다 뿌린 할리우드의 플레이보이였다. 크로퍼드는 보기에 따라서는 그의 성적인 노리개이기도 했지만, 대신 대중의 스타로 군림할 수 있는 기회를 전폭적으로 제공받았다. 메이어와 크로퍼드 사이의 섹스 스캔들은 클린턴과 르윈스키 사이에 일어났던 ‘부적절한 행위’, 그 이상이었다.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못 본 채 태어났고, 두 번째 아버지마저 어머니와 헤어져 어려운 성장기를 보냈던 크로퍼드는 남다른 성취욕을 가진 삶의 파이터였다. MGM에서 그레타 가르보의 라이벌 배우로 대접 받고, 사주인 메이어의 지지까지 받았으니 그녀의 30년대는 인생의 황금기였다. 그런데 영화사 책에 따르면 도무지 30년대의 걸작 리스트에 그녀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레타 가르보 주연의 <그랜드 호텔>(1932)에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지만, 크로퍼드라는 이름을 맨 앞에 걸 만한 걸작은 없는 것이다. 할리우드의 생활은 화려했는지 모르겠지만, 배우로서의 경력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잊혀지고 말 그렇고 그런 수준이었다.

30년대 후반이 되자 급기야 크로퍼드는 흥행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캐스팅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여배우가 서른살을 넘기면 위기를 겪는 시기였다. 1943년, 불쌍하게도 그녀는 MGM에서 사실상 쫓겨났다. 그녀 나이 39살 때 찍은 영화가 누아르의 걸작으로 남아 있는 마이클 커티즈 감독의 <밀드레드 피어스>(1945)다. 일도 없이 놀고 있는 그녀에게 커티즈 감독이 연락을 해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커티즈는 3년 전, 전세계 영화 팬들을 매혹시켰던 <카사블랑카>를 만든 감독이 아닌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녀의 역할이 ‘엄마’라는 것이었다. 남성 관객을 흥분시켰던 스타로서, 엄마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배우로서의 경력을 끝내는 모험이기도 했다. 대개의 경우 ‘엄마’는 성적 매력이 제거된 인물이고, 그런 캐릭터가 스크린의 스타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여배우로서는 더이상 기회가 없을 것 같은 마흔살이 다 된 나이에 크로퍼드는 우리가 기억하는 배우로 거듭난다. 그녀는 강인하고 불굴의 의지를 가진 여성으로 각인되는 것이다. <밀드레드 피어스> 덕분이다. 인상적인 도입부 시퀀스는 필름누아르의 특징을 한눈에 보여주는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강렬한 흑백 대조의 조명, 총소리, 살인, 밤, 비 그리고 살인의 배후에 대한 궁금증 등이 숨가쁘게 제시된다. 살해된 남자는 그녀의 남편, 영화는 나머지 시간을 범인 찾기에 맞춰 진행된다.

거짓말을 하는 플래시백

여기에 이용되는 게 극중 인물 밀드레드의 플래시백이다. 그녀는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고, 살해된 남편과 관련된 그 모든 일을 회상한다. 어떻게 첫 남편과 이혼하고, 두딸을 홀로 키웠으며, 어떻게 부자가 됐고, 또 죽은 두 번째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어땠는지 차례로 전개된다. 모두 범인을 밝히기 위한 단계다. 그러면서 우리는 마치 <시민 케인>(1941)에서 그랬듯, 이 플래시백을 통해 밀드레드의 삶을 알게 된다.

그런데 <밀드레드 피어스>에서 플래시백의 기능은 관습적인 것과는 달랐다. 진실을 증명하는 데 주로 쓰였던 플래시백이 여기선 거짓을 꾸미는 데 쓰인다. 밀드레드는 살인자를 알고 있다. 죽은 남편보다 더 소중한 살인자를 보호하기 위해 밀드레드는 기억을 조작하는 것이다. 사건의 전모를 아는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는 구조는 누아르의 또 다른 걸작인 빌리 와일더의 <이중배상>(1944)이 유명한데, 이는 하드보일드 범죄소설의 스타 작가 제임스 케인의 아이디어에 따른 것이다. <밀드레드 피어스>의 원작가도 제임스 케인이다.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결국 거짓이고, 이의 영화적 장치로서의 플래시백도 거짓으로 이용되는 게 <밀드레드 피어스> 구성의 특징이다. 고백은 사실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뒤집은 것이다. 뒷날 히치콕 감독은 <무대공포증>(1950)을 통해 거짓으로서의 플래시백을 더욱 복잡하게 발전시키기도 한다. <밀드레드 피어스>는 이렇게 색다른 플래시백의 기능을 만들어낸 역할로도 영화사에 기록되고 있다.

크로퍼드는 48살 때인 1954년, 니콜라스 레이의 <자니 기타>에서 마녀와 같은 열정과 중년여인 특유의 관능미까지 과시하며 살아 있는 전설이 된다. 그녀는 젊음의 절정인 20대보다 40대가 돼서야 진정한 배우로 거듭났던 것이다. 남자 배우로는 험프리 보가트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다음번에는 델머 데이브스 감독의 <다크 패시지>(Dark Passage, 1947)를 통해 중년이 돼 스타로 거듭난 보가트의 경우를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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