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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클럽] 누벨바그, 오해에서 비롯됐다?

누벨바그라는 말이 등장한 지 50년이 지난 지금, 그 실체에 대해 생각하다

누벨바그(nouvelle vague)는 한때 프랑스 신세대 영화를 지칭하던 말로,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 그러니까 1958년 프랑스 언론계에 처음 등장했던 표현이다. 누벨바그의 대표적 예로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와 클로드 샤브롤의 <미남 세르주>를 들 수 있다. 또 ‘누벨바그’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장 뤽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를 촬영하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겨우 1년 뒤였다. 어느 날 클로드 샤브롤은 “저는 누벨바그라는 말만 들어도 짜증이 납니다. 우린 우리 스스로를 누벨바그라고 자칭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게다가 그 모든 것이 다 오해에서 비롯됐다면…?

‘누벨’이라…. 그건 사실 순전히 프랑스 것만도 아니다. 제7의 예술인 영화의 ‘모더니티’가 파리에서 분출했다고 하는 건 단지 프랑스 국수주의적 영화사(史)에서 하는 얘기인데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은 그걸 희한하게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50년 전 당시 신세대 프랑스인들이 다소 연극적인 성향에서 벗어나서 스튜디오영화를 출현시켰던 것은 기정 사실이다. 하지만 존 카사베츠가 <그림자들>을 뉴욕 시내에서 가두 촬영한 것은 이미 1957년의 일이었고, 오시마 나기사가 <일본의 밤과 안개>와 <청춘 잔혹 이야기>를 도쿄의 실내촬영소에서 나와서 촬영한 것도 1959년의 일이었다. 또 영국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린제이 앤더슨과 토니 리처드슨이 프리 시네마(free cinema)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프랑스 감독 클로드 를르슈의 표현을 빌리자면 누벨바그는 무엇보다 먼저 촬영주임기사들의 기술혁명이었다. 모든 예술운동이 그렇듯 누벨바그도 어깨에 멜 가벼운 카메라나 엄청나게 무거운 조명기기들을 창고에 두도록 한 더욱 센서티브한 필름의 출현과 같은 테크닉 발전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바그’라…. “그땐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면 무조건 영화인이 되던 시대였다”고 클로드 샤브롤은 증언한다. 1958년에서 1962년 사이 프랑스에서 나온 영화 수는 100편 이상에 달한다. 바로 이때부터 이전 아버지 시대의 영화를 단번에 몰아낸 ‘친구일당들의 영화’라는 신화가 끈질기게 정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건 단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있었던 현상에 불과하다. 즉 누벨바그는 50년대 말에 탄생했다가 60년대 초에는 이미 지나간 얘기가 된 셈이다. 사실 고다르, 트뤼포, 샤브롤 감독도 당시에는 심각한 상업적 실패를 맛보고 있었다. 고다르는 1962년 트뤼포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에서 누벨바그의 마지막 비명(碑銘)을 이렇게 쓰고 있다. “… 우리의 창백한 얼굴을 닮은 이른 새벽, 거기엔 더이상 우정조차 남아 있지 않아. 우린 다들 각자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고, 우리 자신을 이전처럼 롱컷으로만 볼 뿐 더이상 클로즈업해서 보지도 않지. 잠자리를 같이하던 여자애들은 우리의 우정을 돈독하게 해주는 대신 하루하루 멀어지게만 하고 말이야”라고.

같은 해, <카이에 뒤 시네마>는 <162명의 프랑스 신진영화인 사전>이라는 책을 출판하는데, 이 사전에 나오는 4분의 3은 이미 영화사에서 사라진 인물들이다. 그리고 나머지 4분의 1은 이를테면 미술의 인상주의처럼 꼭 집어서 말할 만한 공통성 없이 각기 전혀 다른 예술방향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과연 정말 누벨바그가 어떤 예술의 성향이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다. 또한 알랭 레네, 루이 말, 크리스 마커와 같은 프랑스의 중요 영화인들은 누벨바그에 속하지 않았지만 같은 시기에 데뷔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누벨바그는 진작에 사라졌지만 그 표현만 살아남아서 같은 나라, 같은 시기의 신진 영화인들 그룹을 지칭하는 데 마구잡이로 사용됐다는 얘기다. 90년대 말 한국영화를 뒤흔들었던 영화계의 움직임에 대한 운명도 이와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지금은 이스라엘영화가 누벨바그의 꼬리표를 달고 있지만 어떤 명석한 젊은 이스라엘 영화인 한 사람은 최근 이렇게 귀띔했다. “지금은 우리가 많이 떠 있습니다. 하지만 2년 뒤에는 분명 제각기 뿔뿔이 흩어질 겁니다.” 번역 조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