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얘기요? 좋죠. 미개봉 신작인 <도쿄!> 얘기를 하자고요. 대신 <마더>는 제발….” 인터뷰를 위해 막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는데도 봉준호 감독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얘기만 한다. 차기작 <마더>에 김혜자와 원빈을 주연으로 기용한다는 발표를 이미 해놓은 마당에 이 작품에 관해서 할 얘기가 없다고 자꾸만 발뺌을 한다. 그의 말인즉 심사위원 자격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참가한 당시도 호텔방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기 때문에 줄거리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스스로도 정리가 안 됐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천하의 봉준호 감독이 줄거리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터뷰에 응했을 리는 없다. 물론 부분적인 수정작업이야 진행하고 있겠지만, 그가 이 영화에 관해 운을 떼기로 한 것은 큰 줄기만큼은 확실히 부여잡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경계하고 있는 상대에게 곧바로 ‘<마더>는 무슨 이야기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질 수는 없다. 일단 확실한 캐스팅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마더>의 실체에 서서히 접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김혜자와 원빈을 캐스팅했다는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이제 <마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같다. =시나리오 초고를 3월19일 완성했다. 원래 3월15일까지 끝낸다고 선언했었는데. 그래도 오차범위가 적은 편 아닌가. 프로듀서로 참여하는 바른손 서우식 이사가 <살인의 추억> 때 프로듀서였던 영화사 반짝반짝 김무령 대표에게 “3월15일까지 받기로 했다”고 말했더니 김 대표가 코웃음을 쳤다더라. 그도 그럴 게 <살인의 추억> 때는 애초 삼일절에 초고를 완성한다고 했다가 식목일로 미뤘고, 다시 어버이날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가 현충일로 바꿨지만, 결국엔 제헌절 지나서 광복절 되기 전에야 완성했다. (웃음) 하여간 김혜자 선생에게는 처음 말을 꺼낸 지 4년 만에 시나리오를 전하게 됐고, 원빈은 시나리오를 보고 금방 출연을 결정해줬다.
-애초부터 김혜자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들었다. =이 영화는 어떤 아이디어가 있어서 ‘이걸 김혜자 선생과 해볼까’, 이런 식이 아니라 외려 ‘김혜자 선생과 꼭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데서 출발해 이야기를 떠올린 것이다.
-김혜자의 어떤 면에 매력을 느꼈나. =의외성이랄까. 본인이 원했건 원치 않았건 그동안 한국의 어머니상을 짊어지고 오셨는데, 나는 성격이 이상해서 그런지 그에게서 다른 면을 많이 봤다. 드라마나 토크쇼 같은 데 나왔을 때 보면 의외의, 아주 4차원적인 면을 느낄 수 있었다.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히스테리가 폭발한 느낌이랄까. 몹시 불안정하고 강박 같은 인상을 받았고 거기에 매혹된 적이 몇번 있었다. 그런 게 김혜자라는 배우의 굳어진 중심 이미지 속에서 틈새 사이로 보이니까 더 날카롭게 보였던 것 같다. 그것을 궁금해하고 매력을 느껴서 함께 영화를 하고 싶었다. 김혜자 선생과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아주 오랫동안 간직했던 것 같다.
-그게 대략 언제부터인가. =대학 다니던 시절 ‘영화연구소 노란문’이라는 연합동아리 소속이었다. 그 동아리는 홍대 정문 근처에 조그마한 사무실을 갖고 있었는데 거기서 김혜자 선생의 집이 보였다. 지금은 이사가셨지만 1992년 당시 선생은 아주 예쁜 담을 가진 단독주택에 살았다. 하루는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는데 김혜자 선생님이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오시더라. 동네 마을 가는 걸음거리로 말이다. 너무 호기심이 나서 뒤를 밟았다. 홍대 앞을 지나더니 극동방송국쪽으로 꺾어졌는데 그 골목 안에 드라마 촬영팀이 있었다. 집에서 화장실 다녀오는 ‘간지’로 가더니 곧장 촬영을 하는 것이었다. (웃음) 그렇게 한두 시간 찍으시더니 ‘어, 고생들 해요’ 하면서 다시 그 걸음걸이로 집으로 오시더라. 정말 충격적인 경지였다. 그러니까 16년 정도 된 거다.
-그러다가 어떻게 구체화됐나. =2003년 <살인의 추억>을 개봉한 뒤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어떤 배우와 같이 작업하고 싶냐”는 질문도 여러 차례 받았다. 마케팅팀에서는 그런 질문을 조심하라고 했다. 내가 만약 전지현과 함께하고 싶다고 하면 “봉준호, 전지현에 러브콜!” 식의 기사가 날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때 김혜자 선생과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농담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괴물> 다음 작품으로 김혜자 선생과 함께하는 영화를 하겠다는 마음을 이미 2003년 말에 먹고 있었던 거다. 결국 2004년 1월인가 2월에 처음 인사를 드렸다.
-첫 만남 때 김혜자의 반응은 어땠나. =이런저런 이야기라고 말씀 드렸더니, “내가 TV를 30년 했는데 비슷한 역이면 왜 하겠냐. 이것도 엄마 역할이긴 하지만 다르게 접근하는 느낌이 좋다”고 하셨다. 김혜자 선생은 그동안 영화로는 김수용 감독님의 <만추>와 윤인호 감독님의 <마요네즈>에 출연했다. <만추>로는 마닐라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도 받았고, <마요네즈>도 좋은 평가를 얻었지만, 흥행 면에서는 아쉬움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영화에 대해 약간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만나뵙고 <괴물>에 들어갔는데, 가끔씩 연락을 주셨다. “봉 감독, 우리 내년에는 찍는 거예요?” 이러시면서. 그런 와중에 내가 일본에서 <도쿄!>를 찍는다는 말에 은근히 속이 터지셨을 거다. 나는 그냥 <마더> 시나리오 쓰는 동안 잠깐 일본 가서 찍고 온다고 말씀드렸지만, 그 30분짜리 찍는 데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2007년 한해가 훌쩍 가더라.
-시나리오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 =“아련해요.” 그게 첫 말씀이었다. 사실 선생님 본인도 아련한 면이 있다. 창밖을 보면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기도 한다고 한다. 소녀적인 면을 갖고 계신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나는 ‘가슴에 시퍼런 멍이 드는 느낌, 그런 영화면 좋지 않겠냐’고 했는데 그 표현을 굉장히 마음이 들어 하셨다. 사실적인 영화인데도 의외로 몽환적인 느낌도 있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 원빈에 대해서도 좋아하시더라. 신기한 것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면 눈이 그 어떤 20대 초반이나 소녀 배우보다 크고 반짝반짝거린다. 왜 순정 만화를 보면 여자의 커다란 눈에 별이 몇개씩 들어 있곤 하잖나. 그런 것 같다. 원빈도 놀라더라.
-원빈은 다소 의외의 캐스팅이라는 느낌이다. =일단 자연인으로서 원빈의 이미지가 매우 좋았다. 이 영화의 배경은 시골 내지는 지방 소도시다. 도시와 농촌의 경계 뭐 이런 느낌인데, 원빈이 그런 느낌을 잘 알더라. 강원도 정선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잖나. 중학생 때 산속을 누비면서 뱀 잡고 이런 얘기를 해주는데 재밌었다. 그렇게 순박한 느낌도 있는데다 무엇보다 시나리오와 잘 맞는 게 원빈에겐 억울한 느낌이 있더라. 그게 누명쓰는 역할이잖나. 같은 누명을 써도 원빈이 누명을 쓰면 두배로 억울하고 두배로 가슴이 아플 것 같다. 그는 순둥이 같은데 사건에 걷잡을 수 없이 휘말려 들어가면서 어떻게 하지 못하는 캐릭터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외에 중요한 캐릭터가 있다면. =원빈의 동네 친구가 있다. 항상 붙어다니는 단짝인데 나쁜 놈은 아니다. 원빈이 살인 누명을 쓰게 되니까 형사도 하나 등장하고, 동네 사람들도 한둘 있다.
-주목할 만한 조연 배우들도 있나. =앞서 말한 몇몇 역할들을 빼고 나머지 역할로는 <밀양>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 관객이 잘 못 알아볼 배우들을 찾고 있다. 이 엄마는 아들의 누명을 벗기려고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실제로 험난한 여정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다. 정말 거칠고 낯선 세계로 나간다는 인상을 주려면 준비된 사람, 낯익은 배우보다 ‘어, 저게 누굴까’ 하는 배우가 나와야 할 것 같다.
-엄마는 시골에서 아들의 구명을 위해 도시로 가게 되는데, 농촌과 도시라는 공간적 대비가 있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는 공간도 굉장히 심상적으로 쓰일 것 같다. 캐릭터에 흡수될 것 같다는 말이다. <괴물>은 한강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이야기를 풀었고, <살인의 추억>은 화성에서 찍지는 않았지만 연쇄살인사건의 배경인 화성이 중요했고, <플란다스의 개>는 아파트라는 공간을 미적분으로 쪼개는 것이었는데, <마더>는 엄마와 아들의 마음속을 쪼개는 영화인 셈이다. 그 때문에 시나리오를 쓸 때 좀 당황했었다. <괴물>은 한강을 직접 다니면서 시나리오를 쓰고 그랬는데 말이다. 지금은 오히려 편해졌다.
봉준호 감독은 3월에 열린 홍콩필름마트의 부대행사인 홍콩아시아영화투자포럼(HAF)에 <마더>를 출품했다. 해외 영화 투자사와의 만남을 주선해주는 이 자리를 위해 그는 <마더>의 줄거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마더>는 살인자로 잘못 기소된 28살짜리 남성을 변호하는 부모의 이야기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은 작고 연약한 엄마다. 홀로 맞서는 엄마. 그리고 망상에 사로잡힌 눈으로 공허한 방향을 바라보는 여자다. 그리고 스스로조차 스스로를 멈출 수 없을 만큼 의지가 단호한 여자다. 그녀가 그 일을 파헤침에 따라 어둡고 축축한 비밀이 하나씩 하나씩 열리기 시작한다.” 알 듯 모를 듯한 이야기, 이제 참아왔던 질문을 던질 때다.
-<마더>는 무슨 이야기인가. =불쌍한 엄마의 이야기다. 이보다 더 불쌍한 엄마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처절한 엄마의 이야기다.
-그 엄마가 아들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나서서 사투를 한다, 이런 내용이던데. =연관된 여러 화두들이 있다. 아마도 <마더>는 한국사회나 시대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나의 첫 영화가 될 것 같다. <괴물>을 통해서 뭘 바라보고, 연쇄살인을 통해서 80년대의 뭘 보고 그랬는데, 그런 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뭔가라는 문제에 강하게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인 것 같으면서도 가장 힘든 관계인 듯하지도 않나. 또 엄마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도 있다. 이 영화는 아주 단순하고 원초적인 질문과 많이 연관돼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엄마라는 존재가 무엇 같나. =탐구 중이다. 시나리오를 고치면서.
-그래도 어떤 가설은 있을 것 아닌가.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정도라면. =어머니, 딱 그러면 뭐 생각나는가. 어머니가 좋은가. 이상한 질문 아닌가. 어머니가 싫은가라는 질문만큼이나 이상한. 어머니는 좋다 싫다를 따지는 대상이 아니잖나. 반대로 어머니에게 아들이 좋아요? 아들이 싫어요? 이렇게 묻는 것도 어떻게 보면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 듯하다. 그런 원초적인 부분들이다. 사실 원초적인 모성은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신파적으로 소모되기도 했다. 나도 어머니 하면 뭉클하는 게 있지만 그것을 좀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고 싶다.
-어머니는 뭐 하시는 분인가. =가게 같은 곳에서 종업원 일을 한다. 여튼 그런 처지니 변호사를 구한다 해도 얼마나 대단한 변호사겠냐. 그래서 엄마가 직접 아들의 알리바이라도 밝혀볼까, 혐의를 벗겨볼까 하고 나서는 거다. 엄마는 ‘알리바이’를 ‘알리바리’라고 발음하는 시골 아줌마인데, 그 과정에서 자기가 갇혀 있던 좁은 세계, 그러니까 <전원일기>의 마을 같은 곳에서 벗어나 점점 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되고 미처 몰랐던 어두운 세계도 접하게 된다.
-진짜 무식한 질문을 던져야겠다. 이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가. =엄마다 엄마. 엄마란 무엇인가. 나도 무식하게 답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압축해서 말하면 그것 같다. 나도 엄마가 있고, 당신도 엄마가 있고, 다들 엄마가 있는데, 엄마가 도대체 어떤 존재냐, 엄마란 존재는 과연 무엇이고 어디까지 갈 수 있냐, 이런 거다.
-왜 그런 말을 하고 싶은가. =엄마건 아빠건 그것이 어떤 존재건 간에 존재가 가진 다양한 측면이 있잖나. 다양한 표면이 아니라 본질 자체도 다양한데, 엄마란 존재를 놓고 그런 것을 탐구해보고 싶었다. 나는 항상 중심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영화를 만들었던 것 같다. <괴물>도 괴물이 나오고, 가족이 나오고, 그 가족을 도와주지 않는 사회, 그리고 확장돼서 미국도 나오는 거다. <살인의 추억>은 시골 마을에서 연쇄살인이 일어나고 80년대라는 시대, 더 크게 보면 우리 과거까지 넓혀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심을 향해 들어가는 작업이라 나로서는 도전이다.
-<괴물> 인터뷰 때 미리 구상해놓은 특정 장면이 그 영화를 찍는 원동력을 준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흥분시키는, 찍고 싶은 장면이 있나. =몇개 있다. 김혜자 선생님이 외롭게 혼자 있는 이미지가 있다. 굉장히 넓은 공간에 혼자 있는 이미지가 있는데 빨리 찍고 싶다. 그리고 원빈은… 아 그것도 혼자 있는 장면이구나. 어쨌든 찍고 싶은 장면이다.
-<마더>의 상업적인 가능성은 어떻게 보나. =두 배우가 워낙 훌륭하기 때문에 상업적으로도 뭐… 잘되면 좋겠다.
-이 영화의 관건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사람들 마음을 얼마나 움직이냐, 보는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뒤흔드느냐다. 그래서 나도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생각하고 찍고 싶다.
-그동안 영화들은 특정한 장르인 듯 보이다가 다른 장르와 뒤섞였다. <마더>의 기본 틀거리가 되는 장르는 무엇인가. =살인사건이 나오긴 하니까 아무래도 범죄드라마적 성향이 있다. HAF에 시놉시스를 내라니까 일단 대충 썼는데, 그때도 범죄드라마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써놓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더라. 대신 여성적인 범죄드라마라고 생각했다. 좀 여성적인 영화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범죄드라마지만 굉장히 여성적이고 아름다운 느낌이 있는. 엄마가 주인공이니까 ‘모성 범죄드라마’라고 해야 하나. (웃음)
-스탭 구성은 끝마쳤나. =어느 정도는. 촬영은 홍경표 감독님이, 미술은 류성희 감독님이 맡게 된다. 동시녹음은 이병하 기사님이 담당하신다.
-그동안 죽 김형구 촬영감독과 작업했는데, 이번에는 홍경표 감독과 작업한다. =<모텔 선인장>에서 조감독을 할 때 홍경표 감독은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감독의 제1조수였다. 그 이후 언젠가 한번 함께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죽 있었다. 홍 감독님과 하게 된 것은 김혜자 선생과도 관련이 있다. 그녀의 히스테리, 불안, 미묘한 긴장감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느낌에서는 홍 감독님이 맞다고 생각했다. 김형구 감독님과는 다른 작업으로 만나게 될 것 같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다양한 이미지를 찾아서 참고하곤 하는데, 이번에는 어떤 이미지를 보고 있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찍은 김혜자 선생 사진이다. 내 버릇이긴 한데 직접 사진을 찍어봐야 직성이 풀린다. 지지난해인가 양해를 구하고 찍었는데 그 느낌이 중요하다. 원빈도 조만간 찍을 계획이다. 사진작가로는 아서… 뭐더라, 하여간 그분과 최근에 전시회가 열렸던 헬렌 반 미네의 사진을 자주 보고 있다. 겉으로는 평범하고 부드러운 사진 같은데 이상하게 미묘한 불안정성이 깔려 있다. 주로 인물을 찍는데 여성을 찍는다.
-<마더>는 언제부터 촬영에 들어가나. =9월 중순부터 촬영을 시작한다는 목표로 준비를 하고 있다. 김혜자 선생님이 출연하는 <엄마가 뿔났다>가 9월 초쯤 끝나기도 하지만, 계절적으로도 그때가 딱 맞는다.
-주로 어디서 촬영을 하게 되나. =전라도 지역을 유심히 보고 있다. 그래도 여기저기 다 섞이게 되겠지. 팔도강산이.
그는 또 옴니버스영화 <도쿄!>에 참여했다. 가가와 데루유키와 아오이 유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흔들리는 도쿄>는 히키코모리(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병적인 사람들)를 소재로 한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이성욱 기자의 상세한 현장취재기가 있었고, 머지않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선보일 예정이라 짧게만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흔들리는 도쿄>의 현장에 한국인 스탭을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는데 스스로 외로움을 자처한 것 같다. =영화 내용도 외로움에 관한 것이지만, 정말 외롭게 찍어보고 싶었다. 완전히 혈혈단신으로 가서 외국 로케이션뿐 아니라 외국 시스템도 접해보자는 호기심도 있었다. 셀프 학대를 하고 싶은 느낌이랄까. 전문 조감독에게도 나를 일본 신인감독 대하듯 해다오, 라고 부탁했더니 정말로 아주 힘들게 나오더라. (웃음)
-어쩌면 <도쿄!>가 이후 해외 프로젝트를 위한 준비가 됐을 것도 같다. =최소한, 언어가 다르더라도 배우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확실히 깨달았다. 사실 그동안 외국에서 이런저런 제의를 받아왔다. 할리우드 에이전시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보내는 시나리오는 믿을 게 못 되지만, 실제로 진지하게 고민한 것은 두번이다. 첫 번째는 만화 <20세기 소년>의 영화화였다. <괴물>을 개봉한 2006년 원작자인 우라사와 나오키를 만났었고, 그 뒤 부산영화제에서 일본 프로듀서들과 논의를 하기도 했다. 워낙 좋아하는 작품이라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따져보니까 안 되겠더라. 무엇보다 최종 편집권에 대한 보장이 모호했다. 그쪽 프로듀서들은 “그러니까 서로 잘 협의해서…” 식으로 얼버무리더라. 게다가 원작자의 간섭이 심하다는 것도 느꼈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자기 작품에 대한 애착이 많아서 각색을 직접 하고 있었다. 게다가 캐스팅에도 개입할 수 있도록 계약이 돼 있었다. 좋게 버릇이 든 건지는 몰라도 나는 성격상 시작부터 끝까지 내 마음대로 해야 하는데 안 되겠더라. 또 하나는 로라 지스킨이라고 <투 다이 포> <스파이더 맨> 시리즈를 제작한 프로듀서인데,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갖고 와서 논의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E.T.>와 느낌이 비슷한 괴수와 어린이 이야기였는데, 그렇게 나쁜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누군가 만든다면 극장에서 재밌게 보겠지만 내가 해야 하는 영화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마더>와 <설국열차>가 정해져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계획을 뒤흔들 만큼 놀라운 시나리오가 아닌 다음에야 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략적인 줄거리로 미뤄 짐작할 때 <흔들리는 도쿄>에는 멜로영화적인 요소가 들어 있을 듯하다. =멜로영화라고 명명되면 정말 안 될 것 같다. 전혀 멜로적이지 않은데 이상한 기대를 갖게 될 것 같다. 히키코모리 이야기 아닌가. 외로우니까 사랑하고 싶고, 사랑하려면 서로 만져야 되는데, 닿는 게 싫어서 히키코모리가 된 것이니 거기에서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물어보자. 멜로영화는 왜 안 만드냐. =안 만든 적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영화가 있어서 계속 만든 거지, ‘멜로는 절대 안 돼, 할 수 없어’ 이런 적은 없다. 내가 쓴 사랑 이야기 시놉시스도 두개나 있다. 언젠가는 찍게 될 것 같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사랑 이야기가 있고, 집이라는 독특한 공간과 관련된 사랑 이야기가 있다.
-<설국열차>는 어느 정도 진척됐나. =일단 각색 작가를 정했고, 그분이 초고를 썼다. 각색 작가는 한국 SF작가다. 아무래도 과학적인 토대가 탄탄할 테니까 맡겨보자는 생각이었다. <판타스틱>의 박상준 전 편집장이 소개해준 젊은 여성 작가다. 그런데 나나 박찬욱 감독님이나 지금은 그것을 놓고 집중적으로 파고들 여유가 없어서 검토는 못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마더>가, 박 감독님은 <박쥐>가 끝나야 달라붙을 것 같다.
-그럼 언제쯤 들어갈 것 같나. =올해는 <마더>를 찍고 내년에 개봉한 뒤에야 <설국열차>의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2010년에 프리 프로덕션을 시작하고, 2010년 말이나 2011년 상반기에 촬영하게 되겠지. 결국 시나리오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