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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의 배우스케치] 찰턴 헤스턴

전 지금 찰턴 헤스턴에 대해 뭔가 좋은 이야기를 하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이렇게 인위적인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게 아쉽군요. 왕년엔 그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배우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나 때려도 되는 동네북 같아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죠. 그의 정치적 신념과 연기력에 대한 재평가.

첫 번째 주제는 제가 그렇게 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뭐, 사람들에겐 정치적 의견을 가질 자유가 있지요. 그리고 전 전미총기협회(NRA) 회장이었던 그의 말년 경력이 스튜디오 내의 인종차별을 반대했던 젊은 시절의 행동과 그렇게 모순돼 보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미국이라는 나라의 괴상한 정신체계를 고려해본다면 말이죠. 여전히 괴상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는 거죠. 아무리 <볼링 포 콜럼바인>의 결말이 재미있어도요.

그럼에도 제가 헤스턴의 말년 모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의 실제 모습과 캐릭터와의 연관성을 계속 물고 늘어지는 이유는 뭘까요? 공정하려면 오히려 헤스턴을 몇배 능가하는 뻔뻔스러운 극우였던 존 웨인도 같은 식으로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전 자연인 존 웨인은 재수없어 하면서도 <추적자>나 <역마차>를 볼 때는 그 의견을 잠시 접어두고 여전히 그의 연기에 진지하게 몰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헤스턴의 경우는 그게 좀 어려워요. 이건 그의 연기 스타일과 관련있습니다. 헤스턴은 늘 거대하고 과장되고 남성적이고 조금은 벽돌 같은 인물들을 연기했죠. 사람들은 헤스턴을 두 가지 모습으로 기억합니다. <십계> <벤허> <엘 시드> 같은 대작 사극영화의 주인공, <혹성탈출> <소일렌트 그린> <오메가맨> 같은 종말론적 SF의 주인공. 어느 쪽을 봐도 현대물은 없군요. <악의 손길> 같은 영화들이 예외라면 예외일까요?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게 나쁠까요? 그렇지는 않죠. 헤스턴은 자신의 외모와 스타일에 어울리는 자리를 찾았고 거기서 그 자리에 어울리는 거의 완벽한 연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직도 <벤허>나 <십계> <혹성탈출> 같은 영화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그 영화들로 다시 돌아가는 거죠.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요즘 관객은 같은 장르의 연기라고 해도 좀더 많은 세부묘사와 뉘앙스를 요구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단순한 이미지와 표현으로 일관하는 헤스턴의 연기는 ‘좋은 연기’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요새 인터넷에 떠도는 ‘스티븐 시걸 표정 연기’ 있지 않습니까? 그게 헤스턴에게도 가능합니다. 헤스턴의 ‘분노하는 연기’와 ‘고뇌하는 연기’ 사이엔 큰 외면적 차이가 없어요. 영화 내에서는 효과적이지만 따로 잘라 캡처하면 똑같아 보입니다. 비슷한 입장에 서 있는 존 웨인이 더 유리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웨인이 헤스턴보다 특별히 더 테크닉이 뛰어난 배우는 아니었지만 그의 연기에는 특별한 질감이 있어요. 헤스턴의 연기는 그런 느낌이 거의 없습니다. 그는 관객에게 보여줄 것만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그를 단순하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죠. 빠져나갈 구석이 거의 없는 겁니다. 이게 자연인 헤스턴의 이미지와 연결되면 치명적이고.

그러나 아까도 말했지만, 전 여전히 헤스턴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헤스턴에 대한 요즘 세대 관객의 야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가 가치있는 할리우드 역사의 일부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것이죠. 그러나 그러기 위해 복잡한 의미를 담은 문장을 만들어 그를 변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연기가 그렇게 복잡한 의미를 담은 적은 없었어요. 헤스턴의 연기에 감동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이미 그가 우리에게 전달하려 했던 모든 것들을 다 전달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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