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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소연의 숏은 어떻게 출현하는가? [2]

서둘러 끝난 매장과 지금도 진행 중인 우울증

그러나 <너를 보내는 숲>이 <수자쿠>와 똑같이 시작하면서도 이제까지의 가와세의 영화와 다른 점은 이야기 사이에 시간적인 점핑의 방식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수자쿠>도, <호타루>도, <사라소주>도 영화가 시작되면 누군가와의 이별이나 누군가의 실종이 있고, 그런 다음 갑자기 시간을 건너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때로 그 시간은 너무 길어서 영화 전체가 종종 짧은 프롤로그의 후일담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가와세는 그 시간의 간격을 일종의 미스터리처럼 다루었다. 그러나 <너를 보내는 숲>에는 간격이 만들어내는 어떤 미스터리도 없다. 숲이 흔들리고 나면 누군가의 장례식이 보여진다. 저 멀리 이어지는 행렬. 영화를 다 본 다음 종종 이 장면이 롱테이크로 찍힌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착시이다. 이 장면은 아주 짧게 찍혔다. 이 행렬은 두개의 숏으로 나눠서 찍혔는데 그 사이에 나무를 베고, 그것을 잘라서 장례 행렬에 필요한 소품을 만드는 일련의 행위가 이어진다. 이걸 만드는 사람들은 아무 말이 없고, 그런 다음 장례식 행렬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좁은 오솔길로 장례 행렬이 고개를 넘어간다. 말하자면 상(喪)이 진행 중이다. 한밤중의 숲이 보이고, 텅 빈 숲속의 장소들을 보여준다(그런데 이 숏들은 나중에 시게키와 마치코가 숲속에서 마침내 도착한 장소들이다). 거의 6분에 이르는 긴 서두를 꺼낸다. 그리고 나면 비로소 마치 상복을 입은 것처럼 검은 화면에 하얀 글자로 제목이 뜬다. <모가리의 숲>(殯の森), 우리말 제목은 <너를 보내는 숲>, 영어 제목은 <애도하는 숲>(The Mourning Forest)이다.

첫 번째 질문. 그런데 이게 누구의 장례식일까? 누구의 상이 진행 중인가? <너를 보내는 숲>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보는 등장인물은 마치코가 아니라 시게키이다. 시게키는 마루의 기둥에 기대어 거의 넋이 나간 것처럼 앉아 있다. 무엇이 그의 넋이 나가게 만들었는가? 물론 33년 전에 그의 곁을 떠난 마코의 죽음이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째 보았을 때 모든 장면을 예외없이 카메라를 들고 찍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처음 보았을 때는 카메라를 세워놓고 찍은 장면과 들고 찍은 장면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마치코와 시게키가 맨 마지막에 도착하는 숲을 보여줄 때 카메라는 이동하지만 그 움직임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마치코가 요양원에서 간사와 처음 인사할 때 카메라는 갑자기 ‘흔들린다’. 두 사람은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마치 두 사람의 움직임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흔들린다. 두 번째 질문. 무엇이 카메라를 이렇게 흔드는 걸일까? 이 두개의 분리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가와세의 인용. <너를 보내는 숲>은 기억에 관한 두개의 방식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치매와 죽음. 상(喪)은 이미 끝났지만 애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무 서둘러 끝난 매장과 지금도 진행 중인 우울증. 그때 무엇이 도래하는가? 어떻게 대상을 통과하게 할 것인가? 그런데 이미 상실해버린 대상을 통과하게 만드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나는 살아 있습니까?”라는 이상한 질문

애도 작업의 곤란함을 잘 설명하는 것은 마치코의 애도 행위와 그 회상이다. 이 두개의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마치코를 수상쩍게 보게 만든다. 만일 마치코가 그저 아이를 상실한 어머니라기보다는 어머니를 상실한 여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첫 번째 애도의 행위. 마치코가 요양원에서 보낸 첫날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간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마치코를 그냥 무심하게 보여준다(S#1). 집 앞에 자전거를 세운다(S#2). 방 안에서 액자에 담긴 어린아이의 사진을 보여준다. 옆에는 큰 초가 있다. 그 초에 불을 붙인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그 아이가 마치코의 아들이며,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숏는 사진에서 시작해서 초에 불을 붙인 다음 향불(香火)을 따라 이동한다. 그래서 이 숏의 마지막에 가서야 마치코의 얼굴이 보인다. 그런데 이 장면이 이상한 것은 마치코가 아들(의 사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길을 내리깔고 향에 붙은 불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왜 마치코는 아들의 얼굴을 외면하는 것일까? 그가 애도하는 것은 아들일까, 아니면 그녀 자신일까? 나는 이 신의 다음 숏이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마치코는 향불을 보고 있는데 컷을 해서 다음 숏으로 아들의 영정사진의 액자를 보여준다. 이때 이 숏은 마치코가 필사적으로 그 사진을 보려들지 않는 것을 구태여 그 사진 앞으로 시선을 옮겨놓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진행은 여기서 끝난다.

그 두 번째, 그 회상. 그러나 이 신이 끝나자마자 요양원의 그 어딘가의 문이 보인다. 입구에는 ‘뻐꾸기’라는 히라가나가 쓰여 있다(이 요양원의 이름이다). 그런데 이때 마치 사진 속의 아이의 꾸지람처럼 “나는 살아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들린다. 그러자 갑자기 사람들의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런 다음 장면에서 이 질문이 시게키가 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시게키가 마치코가 아니라 스님에게 하는 질문이다. 가와세는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인물의 숏에서 선행해서 장소를 소개하는 인서트숏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목소리의 주인을 앞의 숏에 연결시켜 그 질문은 마치 저세상에서 건너온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런 다음 재빨리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가고 있다. 먼저 목소리와 육체를 분리시키고, 그런 다음 목소리가 육체를 찾아간다. 우리는 짧은 순간이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을 오인한 다음 다시 원래의 주인에게로 수정한다. 그러나 “나는 살아 있습니까”는 너무 이상한 질문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거의 사용할 수 없는 대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와세는 이 질문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성립시키기 위해서 매우 복잡하게 이 질문의 주변을 배치하고 있다. 난데없는 질문.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상대. 그때 나는 가와세가 목소리의 주인을 수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오해하는 것이 원래의 목표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편집이 수상하게 보인다. 시게키의 아내의 이름은 우연의 일치로 마코(眞子)이다. 그래서 마치코(眞千子)에서 ‘치’(千)를 지우면 시게키의 아내의 이름이 된다. 시게키는 한지에 서예연습을 하는 시간에 마치코의 이름을 보자마자 ‘치’를 검은 먹으로 지워서 마코라고 다시 쓴다. 나는 이 이름의 애너그램을 그 앞의 보이스 오버 장면, 그러니까 “나는 살아 있습니까”라고 말한 그 숏, 그래서 시게키와 (마치코의) 아들 사이를 혼란시킨 인서트숏과 연결시키고 싶다. 불교의 환생, 혹은 순환. 그런데 마치코가 마코의 환생일까, 아니면 시게키가 마코 앞에 나타난 아들의 환생일까? 시간적으로는 마치코가 마코의 환생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영화는 시게키가 마코의 아들의 환생처럼 다룬다.

시게키의 질문에 스님은 대답한다. “살아 있다, 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죠. 첫 번째는 밥과 반찬을 먹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밥은 잘 드십니까? 잘 드시는군요. 반찬도요? 다행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왠지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나요?(시게키가 “내 삶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한다) 삶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건 먹고사는 것과 다른 얘기입니다. 밥은 잘 드시냐니까 그렇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다는 느낌이 안 들 때가 있습니다. 그건 위(謂)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지요. 마음이 비었기 때문입니다. 없는 게 아니라 비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지 살아 있지 않은지를 잘 모르겠다는 건 두 번째 경우란 소리지요. 마치코씨, 그분 손을 잡아주세요. 따뜻한가요? 마치코씨의 에너지가 전해지나요? 그게 살아 있다는 느낌입니다. 살아 있다는 건 실감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 약간의 대화가 더 이어진다. “나는 살아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살아 있다는 건 실감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살아있다는 건 실감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 실감한다는 것. 그런 다음 스님은 시게키의 아내가 죽은 지 33년이 지났다는 말을 듣고 “마코씨는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33년이 되면 부처님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두번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라고 일러준다. 이 말을 듣고 요양원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죽으면 가야 하는 저세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서부터 숏의 이미지와 말은 다시 서로 완전히 분리된다. 혹은 이 신의 이전 단계로 돌아가서 시게키가 한 말이 그의 육체를 떠나 마치 마치코의 아들의 목소리로 오인된 것처럼 목소리가 주인의 몸을 떠나 숏의 이미지에 달라붙는다. 이때 목소리는 나무숲에 붙었다가(S#1) 다시 두명의 노인을 따라간 다음(S#2) 아무 말도 안 하는 노인의 얼굴을 지켜보면서 그 어딘가에서 누군가로부터 나오다가(S#3) 손을 잡자(S#4) 그 장면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거미줄로 이어지고(S#5) 시냇가를 나는 작은 새에서(S#6) 햇살이 비치는 나무숲을 바라보는 것으로 연결된다(S#7). 요양원 실내에 두명의 노인이 앉아 있고(S#8) 부채질 하는 요양원 간사가 보인 다음(S#9) 카메라는 노인들이 한지에 써놓은 이름을 보여준다(S#10). 이름들. 자기의 이름, 혹은 이미 자기 주변을 떠나간 사람의 이름. 치매에 걸린 시게키는 아내의 이름을 쓰고, 반대로 남을 돌보면서 간병을 하는 마치코는 자기 이름을 쓴다. 누구라도 여기서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왜 마치코는 자기 이름을 쓴 것일까? 반대로 시게키는 자기 아내의 이름을 쓴 것일까? 왜 그들은 같은 방법으로 애도하지 않는가? 혹은 왜 그 반대가 아닌가? 마치코와 시게키에게 상(喪)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진행 중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애도는 동일한 행위가 아니다. 가와세는 그것을 한편은 보여주고 다른 한편은 보여주지 않는다. 좀더 정확하게 마치코가 과거에 사로잡혀서 자꾸만 저 시간에 붙들려가는 동안 시게키는 치매에 걸려 자꾸만 지워져가는 저 시간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음을 다룬다. 그래서 마치코의 플래시백은 있지만 시게키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다. 그러나 마치코의 플래시백은 그녀의 과거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매우 의심스럽게 다루어진다. 노인들이 한지에 써놓은 이름들을 보여준 다음 숏는 아무런 주의도 환기하지 않고 마치코를 보여준다. 왼쪽 창문 바깥에 나무들이 보이고, 마치코는 그냥 무심하게 앉아 있다. 그건 앞의 장면들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시게키의 질문이 그의 육신에 선행하는 방식으로 마치코의 남편의 질문이 그의 육신에 선행한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마치코의 태도는 우리를 의심스럽게 만든다. “그날, 왜 (아들) 유세이의 손을 놓았지? 왜 그랬어? 어째서 나는 살고, 유세이는 죽은 거지?” 왜 그녀는 아이를 잡지 않았을까? 왜 자기의 아이를 구하지 않았을까? 왜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야단을 맞아야 할까? 남편이 고통스러워서 눈물을 흘리며 따져 물을 때, 꽃으로 그녀의 뺨을 후려칠 때 피하지 않고 맞으면서, 왜 마치코는 그저 담담하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을까? 왜 이 부부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공유하지 않을까? 한쪽은 슬픈데 왜 다른 한쪽은 죄송한 것일까? 왜 그녀는 슬퍼하지 않을까? 너무 슬퍼서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마치코는 왜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사과를 하는 것일까? 만일 정말 마치코가 고의적으로 아이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말하자면 마치코가 메디아 이야기의 반복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황금 양모를 구하기 위해 이아손이 콜키스에 왔을 때 그에게 한눈에 사랑에 빠진 여자. 그래서 황금양모를 훔쳐 달아나는 이아손을 돕기 위해 쫓아오는 동생을 갈가리 찢어죽인 다음 거의 다 쫓아온 아버지 앞에 던져 그 시체를 줍도록 만들고 이아손과 함께 도망친 딸. 그런 다음 함께 도망친 이아손이 코린트 국왕의 딸을 아내로 삼으려 하자 자기와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나온 아들을 불속에 집어던진 그 여자. 마치코가 잊으려는 것이 자기 아이가 아니라 자기의 행위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상하게도 이 회상장면에서 단 한번도 마치코와 그 남편을 동시에 잡은 투숏은 없다. 시종일관 카메라를 들고 찍었으며, 거의 대부분 투숏으로 찍힌 이 영화에서 구태여 이 대목만 두 사람을 나눠 찍었다. 숏을 나누는 것은 앞의 숏에 대한 상대 숏의 반응을 보려는 것이다(그래서 상대 숏를 ‘reaction shot’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마치코는 거의 반응하지 않는다. 아니, 바라보지도 않는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남편에게 눈 돌리게 만드는가? 그러나 가와세는 이 질문을 더이상 진행시키지 않고 중단한다.

<너를 보내는 숲>과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

그런 다음 1시간37분인 이 영화에서 35분 만에 이야기를 중단하고 갑자기 시게키와 마치코와 함께 숲속으로 들어가서 나머지 전체를 숲속의 그 어떤 장소를 찾아가는 데 할애한다. 길을 인도하는 사람은 치매에 걸린 시게키이고, 마치코는 그를 쫓아간다. <너를 보내는 숲>은 거의 직접적으로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를 따라간다. 아니, 두편의 이야기는 거의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아마도 가와세 나오미는 이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가와세 나오미는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좋아하는 감독의 명단에 타르코프스키를 다르덴 형제, 빅토르 에리세와 함께 뽑았다.

www.kawasenaomi.com.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너를 보내는 숲>은 <스토커>의 ‘형이상학적’ 장소에 가서 다르덴 형제처럼 카메라를 들고 물리적으로 찍은 영화이다. 물론 유머이다). 두편의 이야기의 간단한 환기. 먼저 <스토커>. 과학자와 소설가는 그곳에 이르면 소망을 이루어준다는 구역(the Zone)에 가기 위해서 그곳으로 안내하는 스토커를 찾아간다. 그 구역은 국가에 의해서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며, 게다가 시시각각 그곳을 찾아온 사람의 마음의 변화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변화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곳이다. 스토커는 두 사람을 인도하여 그곳에 간다. 전체 2시간41분 중 거의 2시간15분을 여기서 보낸다. 그런 다음 그곳에 도착한다. 그 다음 <너를 보내는 숲>. 아이를 잃은 마치코는 요양원에 일을 하기 위해 온다. 거기서 치매에 걸린 노인 시게키를 만난다. 시게키는 죽은 아내의 33주기를 맞아 마코의 무덤에 가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다. 마치코는 그를 데리고 무덤에 간다. 그 무덤은 길 잃은 숲에 있다. 그런 다음 그곳에 도착한다. 숲은 일종의 구역(the Zone)이다. 그 스스로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길을 열어주기도 하고 닫기도 한다. 그래서 길을 찾아가면서 동시에 길을 잃는다. 차라리 길을 잃는 것만이 유일하게 그들이 바라는 곳을 향해서 올바르게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버릴 때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는다. 물론 옛 선사들의 화두처럼 진부하게 보이는 이 권고가 하지만 말이 아니라 그들의 간절한 행동이 될 때 이 무모한 모험은 갑자기 어떤 하소연이 된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곳에 도착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종종 이것을 정신적인 의미의 획득으로 이해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거기서 만나는 것은 사실상 빈-사이(空-間)이다. 무언가를 얻었다고 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다. 타르코프스키도, 가와세도 거기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저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는 간절한 소망을 안고 한참을 간 다음 문득 저기 앞에서 멈춰 서는 것이다. 핵심은 저 문턱을 넘어서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저걸 넘어서면 갑자기 모든 것이 제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기. <스토커>에서 세 사람이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방이다. 방이란 동시에 감옥이다. 그것을 안에서 열면 방이지만 바깥에서 열 수 있으면 감옥이 된다. 그때 이 방에는 문이 없다. 그저 문의 프레임이 있을 뿐이다. 소망이란 내가 쉴 수 있는 방인가, 아니면 나를 가두는 감옥인가? 그때 타르코프스키는 문지방을 끝내 넘지 않고 그 대신 문지방 이편에서 저편을 정말 간절하게 쳐다본다. 그 간절함이 거의 사무칠 정도이다. 갑자기 이 방 저편과 이편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비가 내리고, 이들의 여행은 여기서 갑자기 끝난다. 더 갈 수 있지만 여기서 멈춰야 한다. 말하자면 더 갈 수 있지만 거기서 멈출 때에만 비로소 기적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너를 보내는 숲>에서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길이 멈추는 곳이다. 시게키는 그곳이 마코가 이편에서 저편으로 떠나간 경계라고 믿는다. 그들은 더 갈 수가 없다. 매우 의미심장하게도 젖은 몸을 말리며 하룻밤을 보내면서 마치코는 질문한다. “우리는 살아 있는 거지요?” 시게키가 대답한다. “살아 있어, 살아 있고 말고.” 이때 마치코가 질문하고 시게키가 대답한다는 것을 환기해야 한다. 그 역이 아니다. 다음날 새벽 시게키는 아내 마코의 유령을 본다. 그리고 (스님과의 대화가 끝난 다음 한 할머니가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죽으면 말이야”라고 묻자 다른 할머니가 “춤을 추듯 훨훨 날아서 하늘나라로 간다고 하더라고”라고 대답한 것처럼) 마코와 시게키는 훨훨 춤을 춘다. 살아 있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의 문지방. 그런 다음 시게키와 마치코는 다시 계속 걷는다. 그들 앞에 마주한 것은 감당할 수 없게 커다란 죽은 고목이다. 거기서 처음으로 마치코는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다시 걷는다. 여기서 길이 끝난다. 그 앞에서 시게키는 마코의 기억을 담은 일기장을 꺼내든다. 곁에서 마치코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오르골을 연주하는 것뿐이다. 그때 마코의 영혼이 떠나가는 것처럼 멀리 헬리콥터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더 다가갈 수 없다. 타르코프스키와 가와세 나오미를 가르는 것은 욕망의 포기와 애도의 무능력이다.

전생의 반복 혹은 환생의 예행연습

무엇이 가와세를 애도의 무능력에로 이끄는가? 타르코프스키와 가와세를 나누는 것은 그들이 기대고 있는 종교적 열망이다. 그 두 사람이 종교에서 어떤 대답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러나 그 둘은 기독교와 불교의 거리만큼 서로 멀리 있다. 타르코프스키가 성서적 비전을 믿는 것처럼 가와세 나오미는 불교의 가르침을 따라간다. 가와세 나오미는 자기의 영화 안에 줄기차게 불교의 기호들을 끌어들였다. <수자쿠>에서 종종 툇마루에 앉아 있는 할머니가 저 멀리 산을 볼 때 문득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의 소리를 듣거나 혹은 멀리서 종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이 집에는 풍경이 없다. 혹은 절에 가지 않는다. 어디서 들려오는 것일까? 정말 그 소리는 할머니의 고막을 건드리는 것일까? 이때 절에서 존재하는 불교의 청각적 기호는 마치 어디선가 들린다기보다는 마음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다루어진다. 그건 단지 절에 가고 싶다기보다는 서방정토에서 부르는 세이렌의 노래처럼 울린다. 정월 초하루 하쓰모데로 시작하(고 난 다음 우여곡절을 거쳐 다시 동일한 날자 동일한 장소에서 끝나)는 <호타루>의 첫 장면은 마치 커다란 불덩어리가 나라현 대흥사의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것처럼 시작한다. 그런 다음 이 장면의 (찍지 않은 나머지) 첫 절반은, 그러니까 불을 붙이고 절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은, 마지막에 보충된다. 절에서 시작해서 절에서 끝내기. 뒤로부터 앞으로. 혹은 원(圓)의 순환. 가와세의 세 번째 극영화 <사라소주>는 ‘紗羅雙樹’를 일본말의 발음대로 읽은 것이다. ‘사라쌍수’는 부처가 열반에 든 숲속 나무가 동서남북으로 2개씩 서 있던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너를 보내는 숲>에서 “나는 살아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답을 주는 사람은 스님이다. 그래서 <스토커>는 세 사람이 소망을 이루는 방에 도착한 다음 거기서 끝나지 않고 기적을 보는 것이 중요한 만큼, <너를 보내는 숲>에서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중요하다. 말하자면 수난 대신 수행이라는 생각. 그 대신 그 앞에서 시게키와 마치코는 서로가 서로의 대상에 대한 분신과 환생이 된다. 시게키는 땅을 판 다음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이 고통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라고 말하고 그 작은 구덩이에 몸을 웅크리고 눕는다. 그 말은 시게키가 마코에게 하는 말인가, 아니면 마코가 시게키의 몸을 빌려 하는 말인가? 그때 시게키의 그 모습은 자궁 속에 들어간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그 말은 아들 유세이가 시게키의 몸을 빌려 마치코에게 하는 말인가? 그때 마치코는 마치 마코처럼 말한다. “이제 됐어요, 이제 됐어요.” 그건 마코의 자리에서 마치코가 시게키에게 하는 말인가, 아니면 마치코가 시게키의 자리에 온 유세이에게 하는 말인가? 그런 다음 그 둘은 서로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고마움은 무엇에 대한 고마움인가? 나의 행동이 나라는 생각. 그때 나는 누구인가? 이편과 저편 사이(間)의 빈(空)자리. 말하자면 무아지경의 깨달음. 그렇지 않다면 그 눈물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런 다음 왜 마치코는 더이상 울지 않고 결국 웃는가? 가와세 나오미가 빈자리와 함께 세상 안에 머무는 방법. 그때 그 자리를 채우는 기술은 자기가 상대방의 빈자리를 연기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운다. 이것이 이 긴 수행의 대답이다. 분신과 환생의 역할 분담. 그런 다음 영화는 불현듯 끝난다. 그때 카메라는 문득 하늘로 날아오른다.

<너를 보내는 숲>의 마지막 자막은 이렇다. “모가리(殯).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시간, 또는 그 장소라는 뜻. 어원은 ‘모(喪)아가리(あがり)’로 상(喪)이 끝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두 가지로 동시에 읽을 수 있는 제목.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시간, 또는 장소로서의 숲. 그것이 이 영화의 프롤로그이다. 그런 다음 이 숲의 장면이 다시 반복된다. 그런 다음 두 번째 읽기를 제안한다. 상(喪)이 끝나는 숲. 그러나 상이 끝난 다음 이제 함께 껴안고 살아왔던 상실의 대상이 사라졌을 때 그대신 누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고통이 멈추었을 때 확실해지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 아닌가? 말하자면 고통이야말로 애도의 마지막 방어선이 아니었던가? 고통을 치웠을 때 무엇이 죽음을 막아줄 수 있을까? 나는 이상하게도 서로에게 표시한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런 다음 한 사람은 땅을 향하고 다른 한 사람은 하늘을 향할 때, 카메라가 그들을 멀리 떠나갈 때, 그 다음에 그들이 하게 될 행동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왜 카메라는 거기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들의 마지막 제스처가 두 사람의 전생의 반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혹은 그것을 이어질 환생의 예행연습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여기서 멈춰야 한다. 그 다음은 소설가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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