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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봅시다] 독재와 혁명, 전쟁과 보수화의 역사
최하나 2008-05-08

<페르세폴리스>의 시공간적 배경이 되는 이란의 현대사

이란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슬람 문화, 산유국, 핵보유국, 아시아의 축구 강국…. <페르세폴리스>는 단편적인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을 우리의 시선을 격동하는 이란의 역사 앞으로 안내한다. 혁명과 전쟁의 폭풍우를 넘나든 한 소녀의 파란 많은 삶을 따라가기 전, 미리 학습해두면 좋을 이란의 현대사를 간략하게 정리해봤다.

<페르세폴리스>

1. 서구화의 기치를 내건 독재정권, 팔레비 왕조(1926∼79)

이란의 역사는 20세기 들어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했다. 1926년 팔라비 1세로 등극한 레자 샤는 페르시아로 이어져오던 국호를 이란으로 바꾼 뒤 조국의 근대화를 외치며 서구화의 흐름을 주도했다. 그는 근대적인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차도르의 착용을 자유화하는 등 전방위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했지만, 한편으로는 의회를 무력화하고 언론을 검열하는 등 악명 높은 독재자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자 샤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계승한 아들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는 노골적인 친서방 노선을 취했다. 당시 그에 맞서 석유의 국유화를 추진했던 총리 모하메드 모사데크가 미국과 영국 정보부의 사주로 암살되자, 자연히 이란의 이권은 서구 석유회사들의 손에 넘어갔다. 서방세계와의 밀월로 권력을 지탱하던 팔레비 2세는 비밀경찰을 조직해 반대 세력을 말살하는 독재 통치를 이어갔고, 이란 국민 사이에서는 혁명의 열기가 높아져갔다.

2. 이란 왕조의 종말, 이슬람 혁명(1979)

팔레비 왕조에 등을 돌렸던 종교 세력은 1962년 팔레비 2세가 이슬람 재단의 토지를 몰수하는 ‘백색 혁명’을 추진하자 1963년 6월 호메이니의 주도로 반백색혁명을 일으킨다.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고 호메이니는 이라크로 망명했지만, 팔레비 정권에 반발하던 이란 국민 사이에서 그의 영향력은 건재했다. 민간인에게 총구를 들이대며 수천명을 학살한 정권의 강경대응은 반정부운동에 불을 붙였고, 계속되는 파업과 시위로 수세에 몰린 팔레비 2세는 결국 이집트로 도망길에 오른다. 1979년 3월에 이루어진 국민투표에서 98%가 공화국 수립을 지지했고, 망명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호메이니가 4월1일 이슬람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이란의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3. 이슬람 근본주의의 확산

이슬람의 뿌리로 돌아갈 것을 주창하던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으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세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혁명의 공적으로 의회에 진출한 성직자들은 공화국 헌법을 통해 종교계에 초의회적인 권력을 일임했다.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바니 사드르는 혁명기구의 영향력을 축소하고자 했지만, 성직자 중심의 공화당 세력과 번번이 맞부딪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과거 정권 인사에 대한 마녀사냥식의 고문, 재산 몰수, 처형이 빈번하게 자행됐고, 사디르 대통령은 결국 국회의 탄핵으로 쫓겨나 파리로 망명한다. 이후 차도르의 착용을 감시하는 혁명 수호대가 활동하는 등 사회 전반에 엄격한 이슬람 율법이 강요되면서 새로운 사회를 위한 열망은 공고한 이슬람 근본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4. 75년간의 협정을 깬 ‘수로 싸움’, 이란-이라크 전쟁(1980∼88)

1980년 9월 사담 후세인이 통치하고 있던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의 표면적인 원인은 75년 양국간에 체결된 국경협정인 ‘알제협정’을 이란이 파기한 데 있었다. 1975년 팔레비 왕과 후세인간에 체결된 알제협정은 페르시아 만으로 이어지는 샤트 알 아랍 수로를 이라크가 갖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이 알제협정을 일방적으로 무효화하자 양국간에 분쟁이 노골화됐고, 이라크는 수로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침공을 감행했다. 후세인은 이란이 혁명으로 인해 군사력이 약화되어 있고 정치적·경제적 혼란에 처해 있는 만큼 단기전을 예상했지만, 그의 판단은 빗나갔다. 지리한 장기전에 들어서면서 8년 동안이나 지속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100만명의 희생자만을 남긴 채 유엔의 중재에 따라 휴전에 들어갔다.

5. 21세기 이란, 다시 보수화의 길

2005년 6월 ‘제2의 이슬람 혁명’을 주창하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이란은 다시 공고한 보수화의 길에 들어섰다. 테헤란 시장으로 역임할 당시 패스트푸드 식당을 철거하고, 직원들에게 의무적으로 수염을 기르게 하는 등 철저한 이슬람 근본주의로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은 아마디네자드는 “1979년 이슬람 혁명 정신의 회복”을 통치 철학으로 내세웠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무하마드 하타미 전 대통령이 약속했던 핵개발 보류를 깨고 우라늄 전환시설을 가동했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 제재 결의안을 채택했다. 한편 올해 3월 치러진 총선에서 이란의 보수파가 의석의 과반을 차지했고, 이중 대다수가 이슬람의 가치수호를 강조하는 근본주의 세력인만큼 이란사회의 보수화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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