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프로듀서들이 뛰기 시작했다. 4월30일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이 마련한 시나리오 피칭 행사(영화로 만들만한 아이템 설명회)는 위기에 처한 한국영화에 탈출구를 제시하겠다는 이들의 열의를 새삼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참석자가 예상보다 많아 주최쪽이 더 큰 장소를 물색해야 했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40명 가까운 프로듀서들의 질문 공세도 대단했다. “어떻게 두 사람이 사랑을 시작하나요?”“너무 마이너한 소재 아닌가요?”“캐스팅이 어렵지 않겠어요?”“20쪽짜리 트리트먼트를 쓰는 데는 얼마나 걸려요?” 궁금증이 줄을 이었다. 안영진 프로듀서는 “질문이 혹시 안 나오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몇개 따로 준비했는데 괜한 짓이 됐다”고 만족해했다.
열띤 분위기 아래 3시간 넘게 계속된 이날 피칭은 일종의 ‘번외’ 행사다. 조합이 준비하고 있는 본행사는 7월1일 개최 예정인 기획 쇼케이스 ‘히트 바이 피치’(Hit By Pitch). “작품을 개발하기 위한 초기 단계의 자금들을 확보하기 위해” 조합 소속 개인 프로듀서들이 투자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여는 아이템 설명회다. 쉽게 말하자면 프로듀서들이 시장을 여는 것이다. 조합 공동대표인 안훈찬 프로듀서는 “1월부터 팀을 꾸려 준비하다가 한국영화시나리오마켓 수상작가 모임인 스토리즘쪽이 함께하고 싶다고 해서 이 자리를 먼저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날 참석한 프로듀서와 작가 중 뜻이 맞아 ‘짝짓기’에 성공한 팀 또한, 히트 바이 피칭 행사에 접수가 가능하다.
저비용 고효율 제작시스템 지향
수익률 악화로 투자부문이 급격히 움츠러들면서 기획개발비와 경상비를 마련하지 못한 상당수의 제작사들이 도산 위기에 직면했다는 건 이제 다 아는 이야기다. 메이저 제작사들 또한 허리가 휠 지경인데, 개인 프로듀서들의 배고픔이야 말할 나위 없다. 안영진 프로듀서는 “프로듀서들이 아이템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면서 “피칭은 우리 스스로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이자 동시에 우리가 관객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아이템 개발 능력이 있는지 냉정하게 검증하고자 하는 시험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신창길 프로듀서도 “투자자들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것 아니냐”면서 “7월에 열리는 행사가 자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리였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프로듀서들의 이러한 자구 노력은 적극적 ‘일자리 창출’에만 머물지 않는다. “투자자들과 직접 자리를 만들겠다”는 건 기존 제작시스템의 ‘비효율성’을 개선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안훈찬 프로듀서는 “제작사에서는 이미 시장에서 검증이 끝난 낡은 아이템인데도 버리지 못하고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요행으로 투자를 받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본이 예전처럼 호의적이지 않다면” 제대로 된 영화 1편을 기획, 개발하는 데 더 힘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영세의 굴레를 벗을 수 없는 제작사로서는 “어떻게든 서둘러 영화 1편을 찍어야만 한다”는 현실 논리를 벗기가 쉽지 않다. 이 과정에서 ‘돌려막기’가 발생하고 ‘제작비 왜곡”이 일어나며, 투자·배급사의 부담은 가중된다. 투자·배급사들이 라인업 경쟁을 벌이고 외부 자본이 영화계에 흘러들어오면서 ‘묻지마 투자’가 성행했을 때에 가려져 있었던 문제들이 위기 아래서 불거진 것이다.
젊은 프로듀서들이 막무가내로 동정을 구하는 건 아니다.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은 “덩치를 줄이고 기동성은 높이는”, 저비용 고효율 제작시스템 모델을 지향하고 있다. 신창길 프로듀서는 “기존 제작시스템의 성과를 무시하는 건 아니라”면서도 “제작사 간판부터 내거는 것이 영화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고 말한다. 저마다 제 이름 내건 영화사를 만들 것이 아니라 영화화 가능성이 높은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인력들이 모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안훈찬 프로듀서도 “감독, 프로듀서, 작가 등 창작자들이 순수하게 작품을 개발하는 비용으로 기획개발비를 한정할 때 투자자들의 부담이 줄어들고 자본이 다시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제작센터, 완성보증보험 등의 방법도 모색
최근 몇년 동안 “자체 제작에 나서는 등”의 방식으로 콘텐츠 생산에서 주도권을 잡고 싶어하는 투자·배급사로서는 프로듀서들의 다이어트 제작시스템 제안에 솔깃할 법도 하다. 다만 제작사들에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지난해부터 투자·배급사들이 2∼3편 묶음 투자를 거의 하지 않고 있고, 관행적으로 지불하던 경상비도 내주지 않고 있으며, 편당 투자액 또한 대폭 줄인 상황에서 제작사들의 입지는 굉장히 줄어들었다. 안훈찬 프로듀서는 “힘의 우위 관계에 따라서 주체들 사이에서 긴장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제작사들로부터 시장을 교란한다는 비난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투자사들 또한 나중에 우리쪽에서 판권 등에 관한 주장을 하게 되면 태도가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 조합으로선 그런 주장을 할 만한 여력까지는 없다.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건 창작자로서의 기회를 얻기 위해 다양한 매칭을 고려해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들은 “한 개인 프로듀서에게 어떻게 제작을 통째로 맡기느냐”는 우려에 대해서도 고개를 젓는다. 신창길 프로듀서는 “신뢰할 수 없다면 프로듀서 조합에서 제작서비스센터를 마련해서 지원할 수도 있다. 완성보증보험을 활용할 수도 있다. 아니면 투자·배급사 내에 제작팀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지 않느냐”면서 “프로듀서 조합이 원하는 건 창작자들이 끊임없이 재생산할 수 있는 열린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은 상반기와 하반기에 한 차례씩 아이템 피칭 행사를 열 계획이다. 7월1일 행사에 이어 하반기에는 공모 형식으로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 NPIF(New Producer Incubating Fund)라는 이름의 피칭 행사를 개최한다. 원활한 합작을 위해 해외 프로듀서들을 대상으로 한국 프로듀서들의 아이템 피칭 행사도 계획 중이고 지자체를 대상으로 한 투자설명회도 추진 중에 있다. 젊은 프로듀서들의 뜀뛰기가 한국영화의 새로운 모색을 추동할 수 있을 것인지 주목된다.
“잘될 때의 오류도 정화할 수 있는 기회다”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공동대표 안훈찬 프로듀서 인터뷰
안훈찬 프로듀서는 신창길, 안영진 공동대표와 함께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을 이끌고 있다.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은 2006년 말 프로듀서들의 권익 보호와 한국영화 발전 등의 목표를 내걸고 결성된 조직. 회원 수 117명 중 “회의나 모임에 절대 빠지지 않는 진성당원만 40명에 달하는” 점성 높은 조직이다. “영화계가 어려워서 그런가. 회원들의 결속력 하나는 끝내준다.”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의 활동이 외부에 드러난 건 이번 피칭 행사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피칭 행사를 기획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지난해부터 산발적인 논의가 있었다. 그러다 올해 초부터 조합 차원에서 기획력 강화를 위한 프로그램 마련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나왔고, 이 과정에서 지난해부터 이야기됐던 피칭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됐다. 지난해 영화진흥위원회 주최로 열렸던 아이러브프로젝트도 참고가 됐다. 다른 점이라면 시나리오작가들이 제작자들을 상대로 열었던 것과 달리 7월에 여는 행사는 프로듀서들이 나서서 투자자들을 모신다.
-기존 제작시스템 아래서는 새로운 아이템 개발에 한계가 있었다고 보나. =수익성을 좇는 투자사와 영세성을 벗지 못한 제작사 사이에서 아이템들이 영화화돼야만 하는 타이밍을 여러 차례 놓친 것 같다. 사실 제작사가 우위에 있느냐, 투자·배급사가 우위에 있느냐 하는 힘의 역관계는 시기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는데 우리의 경우 직접 콘텐츠 개발이 어렵기 때문에 투자·배급사들이 묻지마 투자도 받아들인 시기가 있었고, 이후에는 반대로 투자자들의 입김이 세지는 상황도 왔고. 복잡한 국면이 된 건 대기업 이외의 자본이 유입되고 우회상장 등을 통해서 제작사들이 자기 자본을 형성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인 것 같다. 이때부터 기존 투자·배급사들은 그렇다면 우리 식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찾겠다는 식으로 간 것이고. 제각각 별개로 가다가 난국에 빠졌다고 해야 하나.
-피칭 행사 등을 통해 어떤 점을 기대하나. =투자받기 어렵기 때문에 이런 행사를 연다고 말할 순 없다. 한국영화산업의 상황이 좋아졌을 때에도 다시는 이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다. 좋았을 때의 오류들을 지금 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피칭 또한 기획, 개발 단계서부터 차근차근 확실한 검증 시스템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이다. 투자자들이 예전처럼 제작사의 브랜드나 감독, 배우의 인지도만을 믿고 자금을 쏘는 시대도 아니잖나.
-우려는 없나. =경쟁력있는 아이템을 내놓을 수 있는지 여부다. 우리가 책임져보겠다고 해서 자리를 만들었는데 정작 거들떠볼 만한 물건이 나오지 않으면 투자사들 또한 과거의 방식을 고수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관객을 다시 불러모을 수 있는 아이템을 확보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가장 큰 바람이고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