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적벽대전. 1962년 추석, 극장가의 형국이 그러했다. 을지극장엔 <화랑도>가 진을 쳤고, 국제극장엔 <인목대비>가 납시었다. <진시황제와 만리장성>은 국도극장에 성벽을 쌓았고, <칠공주>는 피카디리극장을 차지했다. 그리고 명보극장엔 <대심청전>이 판을 벌였다. “제작비가 1천만원이 훌쩍 넘는” 대작영화들이 한날한시에 극장가를 분할 점령했다. 게다가 5편 모두 ‘색채(컬러) 시네마스코프’라는 간판을 앞세운 사극이었다. 추석 프로에 “사운을 건” 제작사들의 혈투는 1961년 <춘향뎐>과 <성춘향>이 벌인 대국만큼 후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신경전은 몇 곱절 이상이었을 것이다. “전례없는 제작비의 경쟁이… (중략)… 한정된 국내시장… (중략)… 에서 어느 정도 승산을 가질 수 있을지 테스트 케이스가 될 것이다.”(<동아일보> 1962년 8월28일)
1960년대 들어 급부상한 충무로의 관심 키워드는 다름 아닌 ‘스펙터클’이었다. 특히 사극과 스펙터클의 궁합은 더할 나위 없었다. “일제시대부터 해방 뒤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된” 장르였던 사극은 <성춘향>이 40만 이상의 관객을 불러모으고 이어 <연산군> <임꺽정> 등이 흥행하면서 이른바 블루칩 장르가 됐다. 게다가 “권력과 국가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적 국면까지 겹쳐 그 인기는 어느 때보다 높았다. 실제 1962년 1/4분기 동안 제작된 영화 31편 중 사극은 무려 10편에 달했다. 화려한 의상과 웅장한 세트를 통해 눈요기를 제공하는 사극의 특성상 이 같은 경작(競作)은 자연스럽게 럭셔리 블록버스터 제작 붐으로 이어졌다. 괜한 허풍은 아니었다. 비단 용포 두르고 대수 머리 튼 국산 스타아들은 쟁쟁한 할리우드산 영화들을 압도했는데, 1962년 추석 상영작 중 그나마 체면치레를 한 외화는 70mm <벤허> 정도였다.
이 무렵 쏟아져내린 사극들의 스펙터클 과시는 엄청났다. “무려 2800만원을 쏟아부은” <진시황제와 만리장성>은 “12만명을 헤아리는 엑스트라와 국내 올스타 캐스트를 동원했다”는 자랑만으로 모자라 “3개월 동안 만든”, “높이 23척, 길이 800m에 달하는” 오픈세트를 기자들에게 공개하기까지 했다. 위용 과시로만 치면 <임진난과 성웅 이순신>은 단연 으뜸이었다. 정부로부터 대규모 대출까지 따낸 이 영화는 모든 ‘최고’, ‘최대’ 기록을 갈아치웠다. 단역배우만 30만명이고, 말만 해도 2만여필에 달했다. 실물 그대로의 철갑선 12척을 남해에 직접 만들어 띄웠으며, 해군수중파괴대(UDT)까지 투입했다. “50여평 규모의 풀에 모형 배를 띄워” 40여컷의 미니어처 특수촬영을 진행하기도 한 이 영화의 제작비는 화폐개혁 이전 기준으로 무려 4억환에 달했다고 한다.
“큰 놈이 센 놈”임을 증명하기 위한 크기 싸움은 사극에서 불붙어 모든 장르로 퍼졌다. 전쟁물과 액션물 또한 대물임을 강조하는 것이 익숙한 레퍼토리가 됐다.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도 “500여명의 스키어를 동원했고, 5만여발의 뇌관을 소비한” 초대형 ‘액숀·스펙타클’임을 내세웠으며, 같은 해 김묵 감독의 <싸우는 사자들> 또한 경기도 포천 일대에 1만여평의 대지를 임대해 국군포로수용소를 만들었다고 광고를 해댔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국군포로수용소를 폭파하기 위해 TNT 폭탄 400파운드를 한꺼번에 터트렸다는 무용담을 덧붙였다. 이듬해인 1963년에 제작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특공작전과 다름없었다. 심지어 국방부 후원, 해병대 지원을 받았는데 탱크 10대, 제트기 12대가 등장했으며, 마지막 장면에선 아예 해병대원 4만여명이 촬영을 도왔다. 조감독들이 “무전기로 연락을 하는” 진풍경을 연출한 첫 영화일 것이다.
“미제(美製)와 똑같은” 치약을 만들고 싶어했던 1950년대의 욕망이 “외제를 몰아내는” 라듸오를 생산하고픈 욕망으로 변화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스펙터클에 대한 집념의 이면에도 이러한 전이가 드리워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펙터클한 욕망은 웃지 못할 해프닝도 불러왔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폭발사고로 엑스트라들의 치료비만도 100만환이 넘었다”. <싸우는 사자들>도 두채의 집을 한방에 날려버린 장면 촬영 때 다이너마이트 파편에 다친 이만 무려 21명에 달했다. <임진난과 성웅 이순신>은 “촬영 당시 화살이 떨어져” 갈대로 대신하는 기지(?)를 발휘해야 했다고 하니, 관객의 야유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총격전 장면에서 공포탄 대신 실탄을 마구 쏘아대던 때, 알려지지 않았으나 ‘돌아오지 않는 해병’도 있지 않았을까. 스펙터클을 실현하기에, 충무로는 아직 보릿고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