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1주일 단위로 쓰는 <씨네21>에선 계절 감각도 남다르게 느끼게 된다. 4월 창간기념호를 만들다보면 봄이 이렇게 가는구나 싶고, <아이언맨> <스피드 레이서>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 등 할리우드 대작이 몰려오면 벌써 여름이 왔구나 실감하게 된다. 계절이 바뀌는 신호는 영화제를 통해서도 확인한다. 여성영화제가 봄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면 전주영화제는 늦봄과 초여름이 교차하는 표지판 같고 부천영화제로 여름을 보내고 나면 가을은 부산영화제와 함께 찾아온다. 여성영화제가 끝나고 창간기념호도 만들어놓고 전주영화제를 기다리는 지금은 오랜만에 주위 풍경에 눈길을 돌리는 시기다. 벚꽃이 언제 피었다 졌는지 몰랐는데 나무들의 연둣빛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계절이 왔다. 전주영화제가 살랑살랑 유혹하는 것 같다.
전주영화제는 <씨네21> 기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영화제다. 올해도 몇몇 기자들이 나를 전주에 보내달라고 편집장에게 로비(? 압력행사!)를 했다. 오모 기자와 최모 기자와 안모 기자라고 이름을 밝히면 당사자들이 곤란하려나? 전주에 가고 싶다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일단 먹을거리가 인기 요인 중 하나다. 전주비빔밥이야 워낙 유명하니까 말 안 해도 알 테고 진한 멸치국물이 특징인 소바며 최고의 해장국인 콩나물국밥, 한상 가득 차려주는 술집 인심까지, 전주 생각을 하면 일단 군침이 돈다. 먹으러 가봐야 서울과 다르지 않은 부천영화제나 먹으러 돌아다닐 틈도 없이 바쁜 부산영화제와 달리 여유가 있는 편이어서 더 그럴 것이다. 취재하고 기사 쓰고 디자인하는 일까지 없으면 금상첨화겠으나 이만하면 지치지 않고 일할 맛이 난다. 올해는 치열한 경쟁 끝에 정한석, 오정연, 안현진 기자가 행운의 주인공이 됐다. 본인들이 행운이라 느끼는지는 확인 못해봤지만.
물론 영화제의 본령은 어떤 영화를 보느냐에 있다. 전주영화제의 상영작 목록을 보니 전주 음식 못지않게 군침이 도는 메뉴다. 우선 벨라 타르 회고전을 한다는 야심찬 기획은 영화제의 개성과 정체성을 대변하는 느낌이다. 지난 창간기념호 특집을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적지 않은 평론가들이 벨라 타르의 <배크마이스터 하모니즈>를 베스트10에 넣었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무려 7시간짜리 영화 <사탄탱고>를 비롯해 지난해 발표했다는 <런던에서 온 사나이>까지 전설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보기 드문 기회다. 나도 소문만 듣던 영화들이라 전주에서 꼭 봐야 할 영화로 체크를 해뒀다. 역시 지난호 특집 베스트10에 정한석 기자가 꼽았던 류우에의 <소설>, 김혜리 편집위원이 뽑은 에릭 로메르의 <로맨스> 등도 눈길을 끈다. 그런가 하면 칠레, 멕시코, 중앙아시아, 베트남 등 널리 알려지지 않은 지역의 영화들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한마디로 프로그래머들이 아주 열심히 영화를 고른 티가 난다. 정치인들이 신경쓰는 국제적인 인지도나 스타들의 참석 여부와 무관하게 전주영화제가 제대로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이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것이다. 사실 좋은 영화제가 되는 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좋은 영화를 골라오는 안목이다. 출범 초기 잡음이 적지 않았던 전주영화제가 안정된 운영 속에 이런 안목을 보여줘서 반갑다.
아무리 영화를 즐기고 싶어도 여러 이유로 전주에 못 가는 분도 많을 줄 안다. <씨네21> 창간기념영화제가 있으니 그걸로 아쉬움을 달래도 좋을 것이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매진된 영화도 있지만 아직 자리가 남은 영화도 많다. 속히 클릭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