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프리드 히치콕이 데뷔하고 스릴러 장르의 흥행 감독으로 자리잡아가던 무렵, 히치콕이 비유되었던 감독은 다름 아닌 ‘프리츠 랑’이었다. 로베르트 비네로부터 시작된 독일 표현주의영화를 완성시켰고, 할리우드에서는 이를 장르화하여 필름 누아르가 독자적 형식미를 갖추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프리츠 랑의 회고전이 2008년 5월9일부터 25일까지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열린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독일 표현주의영화의 걸작에서부터 할리우드 망명 시절의 다양한 장르영화까지 총 19편의 영화가 상영된다.(자세한 정보는 cinema.piff.org에서)
1890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난 프리츠 랑은 그림에 빠진 젊은 시절을 보내다 짧은 군생활을 마치고 영화판으로 뛰어든다. <혼혈>(1919, 미상영)로 데뷔한 프리츠 랑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각인시킨 계기는 독일 낭만주의 전통을 계승한 <운명>(1921)을 연출하면서이다. 겹으로 구성된 독특한 이야기 구조를 갖춘 이 작품에는 그의 후기 영화까지 이어지는 특징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약혼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생명이 필요하다고 저승사자가 제안하자, 소녀는 죽음을 선택한다. 프리츠 랑 영화의 매력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불길하고도 악마적인 운명의 유혹, 그리고 그 틈새에 미세하게 열려 있는 자유의 영역, 이 영역 사이에서 랑의 인물들은 갈등에 휩싸인다.
프리츠 랑이 그린 운명의 힘은 초인적이다. 크라카우거가 랑의 영화를 두고 나치즘의 등장을 예고한다고 지적했던 것 역시 그의 작품이 거부하기 힘든 신비하면서도 초인적인 힘에서 비롯되는 어떤 파국의 지점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악인 캐릭터를 창출한 <마부제 박사>(1921), 로봇 마리아가 고도로 산업화된 도시를 파탄 직전까지 몰고 가는 <메트로폴리스>(1927), 구체적인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신병적인 연쇄살인을 다루는 <엠>(1931) 등은 당시 독일사회 공기의 불안과 공포가 알레고리적으로 담겨 있다. 이는 ‘영화는 시대의 본질을 드러내야 한다’고 믿었던 랑의 영화적 신념의 결과이기도 했다.
괴벨스가 랑에게 나치를 위해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을 때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나치즘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랑은 독일 시절처럼 대작 영화를 연출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할리우드 시절 그의 영화는 다소 굴곡이 있다. 하지만 장르적 표면을 조금만 벗겨내면, 인물의 의지를 넘어 그들을 파국으로 이끌어가는 운명과도 같은 힘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도주하는 연인’ 영화의 원형이자 랑의 영화 중 개인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하나뿐인 삶>(1937)은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강하게 옭아매는 비정한 운명 앞에서 자유를 향한 의지가 좌초되는 연인을 애처롭게 바라본다. 연인의 마지막 입맞춤을 끝으로 극장 밖을 나설 때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하나뿐인 삶>이 필름 누아르 이전에 그 형식미를 이미 선취한 작품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리츠 랑은 할리우드 장르영화에 유럽의 모더니즘적 예술 장르를 접목시킨 감독이었다. 팜므파탈이 운명의 유혹을 대신하는 <창가의 여인>(1944)와 <진홍의 거리>(1946),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또 다른 버전이라 할 만한 <인간의 욕망>(1954)을 비롯해, 필름 누아르의 걸작으로 작품 깊숙이 숨겨 있는 ‘도덕적 아이러니’가 너무도 매력적인 <빅히트>(1953)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의 주제는 양파 껍질처럼 표층과 심층에 겹겹이 구성되어 있었고, 개인의 의지를 압도하는 어떤 압도적인 힘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스며 있었다. 이는 개인적 취향일 수도 있지만 그가 바라보는 미국사회의 단면이기도 했다. 이는 <블루 가디니아>(1953) 등 미국 언론을 냉소적으로 다루는 영화를 보면 좀더 확실히 드러난다. 랑은 1956년 다시 독일로 돌아가 그의 마지막 영화인 <마부제 박사의 천개의 눈>(1960)을 완성한다. 고다르의 <경멸>(1963)에 출연한 그의 모습을 참조하자면, 매일 아침 빵을 팔듯 영화를 팔아야 했던 미국적 삶이 그에게 그리 행복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그가 할리우드 시절 남긴 영화 역시 독일 시절 영화만큼 소중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