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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떠나거나 혹은 정착하거나 [2]

나홍진의 장르적 공간과 김동현의 길

같은 질문을 한국 신진 감독들의 영화로 옮겨보자. 지금 인기를 끌고 있는 나홍진의 장소는 망원동이다. 그곳은 장르적 미끼다. 그곳을 벗어나서는 안 되는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인물들은 벗어나도 다시 그곳으로 모인다. 나홍진 스스로 걸어둔 장르적 제약의 공간이 망원동이며 술래잡기는 거기에서 일어난다. 조창호의 공간은 아직까지 김기덕처럼 개념이다. 그는 공간이나 장소의 설정에 구애받지 않고 판타지를 진전시킨다. 김기덕처럼 그게 조창호가 차지할 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같은 비중의 판타지를 갖고 있지만 신재인의 관심은 ‘그들’에 집중된다. 그녀는 집단과 개인의 관계에 대해 예민하다.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가 고문하는 집단을 상대하는 피해자의 환상적 서커스였다면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과 <신성일의 행방불명>은 그들 사이에서 삐져나온 한 괴인의 차력술이다. 그녀에게는 장소가 아니라 그들, 즉 괴력의 성자와 맹목적인 신도들의 무리를 엿보는 것이 중요하다. 때문에 신재인의 영화는 신화적이다. 신재인이 신화적이라면 윤성호는 정치적이다. 다만 윤성호의 영화는 정치적이지만 공동체적이지 않다. 윤성호는 소통을 믿으며 공동의 아름다운 합주를 믿지만(<은하해방전선>의 전철 합주신), 공동체의 전위에 대해서, 그들이 함께 살아야 할 터전을 일구는 것에 대해서는 망설인다. 공동체적 장소가 윤성호의 영화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내 생각에 공동체를 믿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상투성을 인정하는 게 불가피하다. 윤성호는 상투성에 거리를 두기 때문에 단단한 공동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공동체에 대한 믿음은 종종 장소에 대한 강박으로 드러난다. 한 영화가 강박적으로 한 장소에 붙잡혀 있거나 그 반대로 떠돌 때 거기에는 개인의 사색이 아닐 경우 공동체의 문제가 있다. <상어> <처음 만난 사람들>의 김동현이 후자다. 김동현은 지금 한국에서 머무르지 않는 것만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길이라고 본다. 아니 머무르고 싶어도 낮은 계급의 공동체를 묻는 방법은 길 위에서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떠도는 길이 김동현의 공동체적 장소다. 탈북자와 이주노동자는 그래서 길에서 만난다. 때문에 그의 영화가 불가해할 정도로 아름다운 순간은 달리는 차 안에 카메라를 두고 인물들의 시선으로 창밖에 스치는 건물들을 무상하게 볼 때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순간에도 불구하고 김동현은 공동체를 위해 종종 알면서도 상투성을 끌어안는다. 김동현의 인물들이 서 있는 길과 그들이 떠나온 길의 대척점으로서의 마을. 이 점이 내게는 김동현의 길을 이화동이라는 마을과 공동체라는 문제로 연결해준다. 이화동은 풍경이자 삶, 캐릭터, 로컬리티, 개념, 무대, 인상이 아니다. 그저 끈질기게 마을이다. 그 마을, 그 이화동은 도착하거나, 떠나가거나, 머무르는 곳이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이화동

누군가가 도착하는 마을은 김태식의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의 마을이다. 내가 물음표에 봉인해두었던 두명의 감독 중 하나다. 이화동에서 <경축! 우리사랑>의 봉순보다 먼저 바람이 났던 유부녀가 있었고 그건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에서 바람둥이 중식의 아내인 술집 여주인(조은지)이다. 그녀를 찾은 건 중식(정보석)에게 아내를 빼앗긴 태한(박광정)이다. 태한이 아내를 빼앗긴 뒤 그놈의 아내는 어떻게 생겨먹었나 궁금하여 찾아왔다가 둘이 맞바람이 난다. 김태식은 태한의 동선을 따라 이 영화를 절반은 로드무비로 절반은 마을영화로 만든다. 태한과 중식이 함께 떠돌게 한 다음, 서로 낙산과 이화동이라는 극점에 놓고 하룻밤을 보내게 만든다. 그날 밤 이화동의 비탈길로 노래방 기기를 밀고 당기며 올라가던 중식의 아내와 태한은 그 일이 빌미가 되어 같이 잔다. 이 비탈길을 오르는 아무렇지도 않은 행위가 서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이화동의 비탈길을 올라야 외도가 가능하고 인생의 반전이 온다. 구부러지고 비스듬하게 올라가는 그 비탈길의 지리적 형상은 이 영화의 서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들의 벌거벗은 알몸은 그다지 추해 보이지 않는데 서로 성교했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고 중식이 물어보니 태한도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러니 그들의 알몸이 가리키는 건 욕정이 아니라 한 시절이 끝났으며 다른 시절이 올 것이라는 계기이자 예감이다. 이 영화는 서로의 상대를 바꾸고 다른 상대의 마을에 누군가가 찾아오면서 외도가 아니라 새 출발의 반전을 꿈꾼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건 왜 이런 반전의 이야기, 새 출발의 이야기가 꼭 이 허름한 비탈길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본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강남 사거리에서의 반전과 새 출발이라면 안 되는가.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도시의 욕망에 관한 영화가 될 것이다. 김태식은 공동체를 말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지만, 무언가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의 재결합이 필요하다는 걸 해학적으로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딱 그들이 헤어지는 순간까지만 간다.

이 이화동의 비탈길에서 반전을 꿈꾸는 인물 혹은 모든 걸 털고 새로운 결연의 미덕을 믿고자 하는 영화, 그러니까 두 번째 물음표에서 풀려날 감독과 영화는 노동석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마을은 누군가가 떠나가는 마을이다. “형은 태어날 때부터 내 편이었다. 부모도 다르고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도 달랐지만 형은 끝까지 내 편이었다”라고 종대(유아인)가 내레이션으로 말하는 이 영화의 두 번째 신에서 그는 동네 녀석들에게 쫓기고 있고 기수(김병석)가 나타나 그를 돕는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의 중식의 아내와 태한이 노래방 기기를 끌고 터벅터벅 올라가던 바로 그 언덕길에서 기수는 나타나 종대를 지킨다. 종대는 바람난 유부녀가 아니라 총을 갖고 싶은 소년이지만 이 소년의 욕망이란 결국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을 바라는 반환점에의 욕구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에서는 누군가가 이 마을을 찾아야 전환이 가능하지만,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에서는 누군가가 이 마을을 떠나야 가능하다. 종대는 마침내 마지막 신에서 마을을 벗어난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아홉은 마을영화의 장면으로, 그중 마지막 한 장면만이 로드무비로 이루어져 있다. 종대와 여자친구와 그들이 엄마에게 데려다주려는 요한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다. 요한이 오줌 마렵다고 하고 길 위에 서서 요한의 엉뚱한 질문을 받을 때 종대의 얼굴을 프리즈 프레임으로 걸고 영화는 멈춘다. 그때 우리는 종대가 마을을 떠나고 대신 기수가 마을에 남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기수의 동선을 눈여겨보자. 그는 이 마을에 붙들려 있다. 기수가 늘 지나치는 굴다리, 그곳 역시 이화동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간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있는 것으로 설정된 그 굴다리는 기수를 붙잡는 이 마을의 신령과도 같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는 그 다리 위로 기차가 달린다. 더이상 기차는 달리지 않아도 성인이 된 기수는 다리 아래를 꾸준히 맴돈다. 악수하는 소년은 늘 거기서 기다리며 “기수야, 악수하자”고 말한다. 사기당하고 술에 취한 종대는 그 다리 위에 서 있고, 기수가 문득 그 다리 위를 뒤돌아볼 때 기차는 지나가지 않지만 기차 소리는 들려온다. 더이상 기차가 달리지 않는 철로 아래를 기수는 언제나 맴맴 돌고 있다.

노동석은 이 마을의 공동체라기보다는 이 마을의 인간애에 대한 믿음을 피력한다. 혹은 장소의 공동체가 아니라 다가올 세대의 공동체를 믿는다. 그러면서 인물들의 성장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지만 소년의 어설픈 질문에 대답할 때 종대는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마을에 잡혀 있기 싫고 떠나야만 하며 영화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 영화에는 마을을 떠나고 싶은 욕망(종대)과 붙들려 있는 현실(기수)이 있지 이 마을을 어떻게 새롭게 할 것인가의 추진은 없다. 그들을 탓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을의 연대를 믿지 않을 뿐 그들만의 인간적인 새로운 연대를 믿기 때문이다. 미래의 시제와 과거의 시제의 부정교합을 믿는다(“훌륭한 소년이 될 거예요?”). 노동석은 환상에 기대지 않고 정서에 기대고 마을의 공동체가 아니라 소수 표본의 인간적 우애에 기댄다. 청춘의 이상적 공동체는 길 위에 남으며 그건 아직 오지 않았고 미완이지만 그것 역시 아름답다.

정착민적’ 환상의 영화 <경축! 우리사랑>

그럼 가난한 마을의 장소적 공동체란 결국 불가능한가. 오점균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봉순을 바람나게 한다. 바람이 났지만 그녀를 당당하게 묘사한다. 그건 이 마을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구상뿐 아니라 봉순에게도 있다는 뜻이다. 기필코 머무르는 마을이 <경축! 우리사랑>의 마을이다. 오점균은 거의 이화동 영화라고 부를 만한 강박을 갖고 있다. 구상이라는 인물의 이름 짓기. 1919년에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난 시인이 있었고 그의 이름이 구상이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구상이라는 이름이 흔치는 않기 때문에 오점균이 이화동과 구상을 거의 하나의 결연체로 보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오점균은 다음 영화에서 합리적 공동체에 관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그는 <경축! 우리사랑>으로 미리 환상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합리적 공동체는 아름다운 현실의 이상이지만 영화적으로는 지루할지 모른다. 대신 그다지 결이 곱다고는 할 수 없으나 <경축! 우리사랑>이라는 환상적 공동체는 재미있다. 이 환상적 공동체 추진 프로젝트가 이 영화의 숨은 주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 환상이 추구한 건 말도 안 되는 공동체다. 그걸 위해 오점균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누구도 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도록 붙들어 매둔다. 풀과 똥파리를 보여주는 이 영화의 뜬금없는 생태적 인서트컷. 그건 그렇게 붙들어둔 인물들에게 오점균이 우리 함께 키우자고 제안하는 텃밭의 꿈이다. 오점균은 그걸 기르는 공동의 손길을 보고 싶어한다.

오점균이 ‘머무르는 마을’이라는 환상을 사수하는 이유는 단 하나의 장면을 보고 싶어서다. 물론 감독의 의도 중 하나는 나이든 봉순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영화가 강하게 품은 이상은 온 마을의 ‘봉순들’이 전부 다 임신하는 것이다. 예컨대 봉순과 구상이 홀연히 마을을 떠나고 카메라가 그들을 쫓아 마을 바깥으로 벗어났다면, 봉순과 구상이 로드무비의 주인공이 되거나 다른 곳에 정착했다면 이 마을의 놀랄 만한 임신은 없었을 일이었다. 봉순과 구상의 사랑은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이 마을의 ‘생산적 활동’을 위해서다. 온 마을의 아낙들이 모두 임신하기 위해 그들이 남는다. 그들은 모두 임신하기 전날 밤 기어코 야밤에 좌판 앞으로 나와 전야제를 즐기듯 춤을 추지 않았던가. 그건 거의 생산적 활동을 목전에 둔 이 마을의 제의와도 같다. 그리고 나면 마을에는 임신이 축복처럼 퍼진다. 그 이화동의 생산적 활동을 위해 봉순과 구상이 말도 안 되게 남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숨겨진 응원은 ‘경축! 우리사랑’이 아니라 ‘경축! 이화동의 임신’, ‘경축! 이화동의 생산적 활동’이다.

<경축! 우리사랑>에서는 이 마을이 지겹고 미칠 것 같다며 떠났던 사람들조차 다시 돌아온다. 이미 파탄난 관계에 있는 사람조차 머무른다. 이미 아내에게 돌아가겠다고 하씨는 선언했는데도 그를 따라 이 마을에 들어온 미용실 여주인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가지 않는다. 한번 들어온 사람은 나가지 않으려 하고 나갔던 사람은 결국 되돌아온다. 딸 정윤은 두번 나가고 두번 돌아온다. 처음에는 구상을 버리고 나갔다가 가정을 세우겠다고 다시 돌아오더니, 마을에 잔치가 벌어지던 날 가방을 싸서 다시 나간다. 하지만 그녀는 다음 신에서 이미 돌아와 있고 봉순의 아이, 자기의 동생을 보고 있다. 모든 건 이 마을에 머무르는 것으로 귀결된다. 도대체 이 마을에 무엇이 있기 때문인가. 아무것도 없다. 가난한 풍경이 있을 뿐이다. 비탈길과 육교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 그러니 봉순의 이야기는 호프집 여주인의 이야기로, 정육점 여주인의 이야기로 바꿔도 말이 된다. 오점균은 그래서 모두가 임신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목민적이라는 근사한 말이 있다. <경축! 우리사랑>은 유목민적이라고 할 때 꿈꾸어지는 그 환상적 틈새를 보장하되 완전히 대척점에서 같은 목표를 이룬다. 이를테면 <경축! 우리사랑>은 정착민적 환상의 영화다. 도주선의 활로만이 틈새를 열 것인가. 그 반대의 방법도 가능하다는 걸 <경축! 우리사랑>은 보여준다. 정착하고 싶은 사람들의, 정착민들의 막무가내 환상 속에서 갑자기 틈이 열린다. 유목민적 환상의 힘이 있는가. 여기 쫓아도 쫓아도 기어이 버티는 정착민적 환상의 힘이 있다. 그러니 <경축! 우리사랑>이 놀랄 만큼 훌륭한 영화가 아니어도 괜찮다. 나는 이번 주말 버스를 타고 이화동에 갈 것이며 봄날의 햇살을 받으며 그 언덕길을 걸을 것이다. 태한과 중식의 아내가 오르던, 종대와 기수가 힘을 합치던, 봉순과 구상이 만나던 그 길,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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