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불쑥 사촌동생이 테이프를 밀어넣으며 말했다. “누나, 이거 한번 봐.”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이런… 두 시간 꼼짝도 못하고 강하게 시선을 고정시킨 나는, 일종의 충격에 휩싸였고 그 시간 이후 나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정확히는 아니메에 꽂히고 만다. 오토모 가쓰히로의 <아키라>. 그날 이후 나는 <아키라>의 세례를 받고 아니메에 입문했다고, 감히 떠들고 다녔다.
그리고 이제 내 인생의 영화,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를 말한다. 아니메를 찾아보며 관심이 증폭되던 그 시절의 어느 날, <씨네21>에 실린 기사가 마음을 뒤흔들었다. 1995년 하반기, <공각기동대>와 <메모리즈>가 한 페이지씩 차지한 것이다. 최고의 영화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블레이드 러너>를 거론하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를 존경할 정도로 웰메이드SF를 좋아하고 인간의 정체성을 끌어안고 고민하는 유의 영화에 감동하는 나로서는 이 두편의 아니메에 강하게 끌릴 수밖에. 보자! 이건 봐야 한다!
어렵사리(사실은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지금의 인터넷 이전에 4대 통신을 쓰던 그때는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메 작품을 구하기에 어려운 시기는 아니었지) 구한 <공각기동대>는 자막도 없고 (난 일본어를 못한다) 화질도 좋지 않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은 인간의 기억과 정체성에 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져댔다. 쿠사나기의 등장. 이어지는 파격적인 오프닝 타이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끌어안고 물속으로 다이빙하는 쿠사나기. 그리고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나 망명을 요청하는’ 그, 인형사… 이후 자막이 있는 비디오를 재구입했고 쉽지 않지만 거부할 수 없는 이 작품을 몇번이고 돌려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개최되면서 수영만에서는 <메모리즈>가, 부산극장에서는 <공각기동대>가 상영되기에 이른다.
가자! 여기 가야 한다! 하지만 당시 맡고 있던 프로그램이 일일, 주간 프로그램 두개씩, 녹음 프로그램이어서 도무지 짬을 내기 어려운 때였다. 그때 기적같이 게스트의 사정으로 하루가 비었고 주저없이 휴가를 내고 부산으로 달려갔다. 하루 다섯편의 영화를 채워보고 잠을 잔 뒤 다음날 오전, 드디어 스크린으로 <공각기동대>를 만났다. 아아… 커다란 스크린에서 쿠사나기가 떨어져 내리는 첫 장면…. 아직도 정신을 모으면 그 느낌이, 그 감동이 살아난다.
1998년 2월. 나는 CBS-FM <신지혜의 영화음악>의 제작과 진행을 맡게 되고 영화에 대한, 영화음악에 대한 사랑을 풀어놓을 장을 만났다. 그렇게 수년이 흐르면서 작은 영화제를 꿈꾸던 나는 2004년 일을 벌이고 만다. ‘제1회 신영음영화제’를 개최한 것이다. 3일간 극장의 마지막 회차만 상영한 초미니영화제였지만 <신지혜의 영화음악>으로서는 큰 의미가 있었고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준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 <신지혜의 영화음악>의 색깔을 확실히 드러내버렸으니….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를 개막작으로, (연출은 아니지만 제작을 담당했던) <인랑>을 두 번째 날 상영하고 오시이의 신작으로 개봉 직전의 <이노센스>를 폐막작으로 사흘간의 일정을 채웠다. 스크린에서 다시 만나는 <공각기동대>, 그것도 나 자신이 기획, 연출하고 청취자로 구성된 스탭들이 열정을 쏟은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공각기동대>였으니 정말 이 작품은 ‘내 인생의 영화’가 아닐 수 없다.
팁을 하나 얹자. 수년 뒤 <공각기동대>의 속편 격으로 <이노센스>가 만들어졌는데 두 작품은 마치 색감에 변화를 준 데칼코마니 같은 느낌을 준다. 전편에 이어 가와이 겐지가 음악을 맡아 O.S.T마저 대구를 이루는데, <이노센스>의 마지막, 모든 음향이 사라지고 멍한 머릿속으로 이토 기미코가 부른 <Follow Me>의 첫 소절이 들릴 때면 절로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