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프: 하하. 이걸로 비앙카가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면 재미있겠당. 라스가 사는 마을 사람들 같은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지는 영화가 또 한편 개봉되죠. <댄 인 러브> 말입니다.
어스: 맞아요.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에 동화책에서 집단 탈출한 듯한 이웃들이 등장한다면 <댄 인 러브>에는 그런 가족이 나오죠.
헬프: 어떻게 보면 퇴행적이라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어요. -_-
어스: 아내를 여의고 세딸을 키우는 상담 칼럼니스트 댄(스티브 카렐)이 추수 감사절 가족 모임을 위해 부모 집에 왔다가 하필 동생의 여친(줄리엣 비노쉬)과 사랑에 빠지는 난감한 로맨스입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칼럼니스트 댄이 아침에 기상하는 장면인데요.
헬프: 옆에 아내가 있는 줄 알고 더듬거리다가 없음을 확인하고 쓸쓸하게 일어나는 장면이죠.
어스: 더블베드인데도 한쪽에 몰려서 자고, 그의 옆에는 연인이나 배우자가 아니라 밤새 보던 자료들이 누워 있더군요. 보는 제 가슴도 쓰라렸어요. 남의 일 아니거든요. -.- 특히 펜에서 잉크가 새서 이불에 묻었거나 깔고 잔 자료의 스테이플러 칩 자국이 뺨에 남아 있을 때는 정말 서럽죠. T-T 나이 들면 피부 탄력 저하로 자국도 잘 안 없어져요, 흑.
헬프: 일과 휴식은 확.실.히. 분리하셔야 합니다. 침대에서는 잠만 자자! (무슨 70년대 가족계획 구호 같다….) -..-
어스: 그런데 “<어바웃 어 보이>의 제작진”이라는 홍보 문구 영향 탓인지 그 영화를 좀 과하게 벤치마킹하지 않았나 싶은 인상이었어요. 이 영화의 대가족은 <어바웃 어 보이>의 친구/이웃 그룹을 대신한 것 같았고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의 어색한 노래장면이 있는 것도 비슷했죠.
헬프: 노래장면이나 춤장면이 확실히 좀 공식적으로 쓰인 부분이 있죠. 이 영화의 가족은 아주 푸근하고 따뜻하지만, 그 끈끈한 가족애가 지나치게 퇴행적이란 인상은 지울 수가 없더군요. 수십명 대가족이 모여서 서로 함께 춤추고, 남녀 편갈라서 설거지 내기 크로스워드 게임을 하고, 학예회처럼 한명씩 무대에 올라 장기 자랑을 하고…. 특히 실연을 막 겪은 미치가 그 아픔을 가족과의 게임으로 해소하는 장면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어스: 사실 좀 무섭죠. 프라이버시란 눈씻고 찾아도 찾기 힘드니까요. 많은 캐릭터가 실리콘으로 만든 듯(앗, 여기도 리얼 돌?)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과 더불어 <댄 인 러브>의 약점은 플롯 진행이 군데군데 작위적이었다는 점이에요. “하필이면 그때!” 라고 느껴지는 고비가 몇 차례나 있거든요.
헬프: ‘시나리오의 냄새’가 너무 강하다는 게 가장 큰 단점이죠.
어스: 조크를 먼저 만들고 그것을 중심으로 장면을 구성한 다음, 그것을 기승전결에 맞춰 배열했다고나 할까요.
헬프: 동감! 예를 들어서 두 남녀가 모든 상황이 쑥밭이 된 상황에서 볼링장으로 들어가 아이처럼 볼링을 하면서 히히거리는 장면은 아주 이상한 설정인데, 그런 설정이 들어간 이유는 그 다음에 둘이 그곳에서 로맨틱한 키스를 하는 장면을 가족에게 들켜야 하기 때문이죠.
어스: 그리고 형에게 애인을 뺏긴 셈인 동생에게 재깍 대체할 여자친구가 생기는데, 에밀리 블런트가 분한 이 여인은 그저 가족의 평화로운 정경을 파투내지 않기 위해 투입된 접착제처럼 느껴져요. 물론 블런트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이어 섹시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적절한 연기를 보여줬지만요.
헬프: 오직 관객이 두 주인공의 사랑이 이뤄지는 것을 볼 때의 도덕적인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해서죠. 같은 경우가 <마법에 걸린 사랑>의 종반에도 있었잖아요. 여주인공에게 외면당한 동화 속 왕자가 현실의 여성과 맺어지는.
어스: 하지만 <댄 인 러브>는 <마법에 걸린 사랑>과 달리 현실적 층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라 불편함이 조금 더 하죠. 게다가 <마법에 걸린 사랑>의 ‘스워핑’은 현실과 환상의 적당한 조합이 좋은 사랑을 만든다는 나름의 주제와도 연결이 그나마 있었으니까요.
헬프: 로맨틱코미디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감각이 있다면 ‘귀여움’이 아닐까 싶은데,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상당히 성공했다는 느낌이 있어요. 전 스티븐 카렐의 연기가 좋더군요. 사실 뻔한 이 영화를 살려낸 경우라고 생각해요. 이전부터 카렐의 얼굴에는 좀 비극적인 진지함 같은 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코미디에서 묘한 입체감과 페이소스를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어스: 그의 전작 <에반 올마이티>에 비하면 <댄 인 러브>는 훨씬 은근하게 이 배우의 장점을 잘 살렸죠.한편 줄리엣 비노쉬는 아까 언급한 줄리 크리스티와 함께 어떻게 늙고 싶은지를 생각하는 여성 관객에게 좋은 대답이 되는 배우예요. ^^
헬프: 비노쉬는 정말 아무런 방어벽없이 웃는 여배우라는 점에서 독특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어스: 정말 그 웃음! 전 <나쁜 피>에서 그녀가 웃는 걸 처음 보았을 때 무슨 성인이 저렇게 갓난아기처럼 웃을 수 있을까, 충격마저 받았더랬어요.
헬프: 거의 폭소에 가깝죠. ^^ 이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잉글리쉬 페이션트>나 <퐁네프의 연인들>에서도 거의 정신나간 사람처럼 넋을 놓고 마음껏 웃잖아요? 그건 캐릭터가 아니라 자연인 비노쉬의 느낌이란 생각이 절로 들죠.
김혜리: <천일의 스캔들>은 치정관계가 얽히고설킨 구식 소프오페라 같은 면이 있죠. <달라스>나 우리나라로 치면 궁중 여인 열전류의 드라마요. 이동진: 무엇보다 캐릭터들이 앙상하다는 게 치명적 단점이라고 봤어요. 스토리의 정해진 궤도로만 달리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핵심 정서라고 할 수 있는 자매의 애증까지도 그리 잘 살아 있다고 볼 수 없어요.
어스: <천일의 스캔들>이 우리의 마지막 영화네요. 저는 아직도 리처드 버튼이 헨리 8세, 쥬느비에브 비졸드가 앤 볼린으로 분한 <천일의 앤>을 TV에서 보았던 기억이 선해요.
헬프: 워낙 텔레비전에서 많이 해준 영화죠.
어스: 그렇게 사랑하던 여자를 목을 쳐서 죽였다는 결말이 어린 마음에 충격이었죠.
헬프: 권태에는 그렇게 잔인한 구석이 있어요.
어스: 하지만 전해지는 헨리 8세 초상화를 보면 확실히 이번 영화의 에릭 바나는 지나치게 미화된 버전이 아닌가요? 리처드 버튼이나 다른 판본에서 헨리 역을 맡았던 레이 윈스턴이 훨씬 닮았어요. 게다가 에릭 바나는 <트로이>에서 그리도 멋지던 헥토르가 이 무슨 부끄러운 캐릭터입니까…. 물론 유능한 군주였다고는 하지만. --;
헬프: 세심하죠, 로맨틱하죠, 게다가 몸까지 좋잖아요.
어스: 아마 스칼렛 요한슨이 분한 메리 볼린이 왕과 정말 사랑에 빠졌다는 내러티브를 설득하기 위해 헨리 역에 멋있고 섹시한 배우가 필요했을 거예요.
헬프: ‘바나’(burner^^)까지는 아니라도 헨리 8세 역이라면 관객을 후끈 달굴 수 있어야 하는데 너무 납작한 캐릭터라서리….
어스: <천일의 스캔들>은 치정관계가 얽히고설킨 구식 소프오페라 같은 면이 있죠. <달라스>나 우리나라로 치면 궁중 여인 열전류의 드라마요.
헬프: 이 이야기는 실제, <튜더스>란 미드로 만들어지기도 했잖아요? <천일의 스캔들>은 철저히 야사적인 시각을 가졌죠? 야사에서 가장 애용되는 모티브가 ‘처벌받는 야망’이잖아요. 그런데 결국 야망이 처벌받는 걸 보여주긴 하는데, 그 야사에 몰두하는 대중의 심리는 주인공의 야망과 극적인 신분상승에 대한 미묘한 동일시에 그 핵심이 있죠. 뻔한 불륜 드라마를 보는 관객의 심정과도 비슷한 맥이 있어요.
어스: 처벌받는 인물 앤 볼린(내털리 포트먼)의 행동이 좀 지나치게 현대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은 했습니다. 특히 왕의 선물을 연거푸 거절하는 모험적 행동은 마치 “재벌 2세 실장 마음을 빼앗으려면 그를 무시해서 당신 같은 여자 처음이야라는 반응을 끌어내라”는 농담의 실례를 보는 것 같았어요. -_-#
헬프: 왕과의 관계에서 그녀가 하는 행동에는 확실히 그런 느낌이 강하죠. 뭐, 거의 각색의 만용이랄까요. ^^ 실제 앤이 그와 유사한 전략을 썼다고 하더라도, 좀 과한 각색의 측면이 없지 않았어요. 전 이 영화가 아주 잘못된 것도 없지만, 이렇다 할 매력도 없는 것 같아요. 그냥 헨리 8세의 스캔들이라는 소재가 가진 화끈한 인화력에만 기댄 인상이죠.
어스: 두 자매를 통해 극단적으로 대별되는 유형의 여인상을 보여주려고 약간 무리를 한 감도 있죠. 그래도 시대 의상을 보는 매력은 확실히 있어요. 당시 회화를 보면 여인들의 머리장식이나 드레스를 잘 고증하고 아름답게 표현했음을 알 수 있죠.
헬프: 샌디 파웰의 시대극 의상은 확실히 눈요깃감이 되지요.
어스: 저는 이 영화에서 세명의 주인공보다 아라곤의 캐서린 역할을 한 아나 토렌트와 두 자매의 엄마 볼린 부인 역을 한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에게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헬프: 볼린 부인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어리석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죠.
어스: 영화에 암시된 전사(前史)를 보면 그녀는 오로지 사랑 하나를 위해 신분 하락을 감수하고 남편과 결혼한 여인인데, 바로 그 남편이 자기와 함께 삶을 걸고 지키려 한 가치관을 딸들을 물건 취급하며 배반하는 현장을 보는 심정이 어떻겠어요. 그건 남편과 공유해온 인생 전체에 대한 절망이라고 할 만한 거죠. 마지막에 남매를 차례로 잃을 때는 거의 그리스 신화에서 일곱딸과 일곱 아들을 신의 화살에 잃는 니오베를 연상시키더군요.
헬프: 그 말에 일정 부분 동의를 하면서도 좀 다른 느낌도 받았어요. 볼린 부인은 이 영화에서 홀로 텍스트와 떨어진 채 온갖 훈수를 두는 내레이터 같다는 느낌이 있다는 겁니다. 극중에서 스캇 토머스가 하는 대사들을 들으면, 다른 인물들과 대화를 한다기보다는 상황에 대해 몇 발짝 떨어져서 팔짱 끼고 코멘트를 하는 것처럼 보여요.
어스: 극의 외부에서 들려오는 선지자의 목소리 같다는 거죠? “데어 윌 비 블러드…” 하는 식으로. ^^
헬프: ^^ 그렇지. 거의 <밤과 낮> 첫 장면에 등장하는 거지 캐릭터나?? <10,000 BC>의 내레이터 오마 샤리프 같은 캐릭터라는 거죠. ^^
어스: 아마 제가 그렇게 열외인 그녀의 캐릭터만 좋아했다는 사실 자체가 뒤집어 말하면 이 영화의 나머지 부분에 몰입을 할 수 없었다는 방증이겠죠.
헬프: 이 영화는 무엇보다 캐릭터들이 앙상하다는 게 치명적인 단점이라고 봤어요. 스토리의 정해진 궤도로만 달리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극을 이끌어가는 핵심 정서라고 할 수 있는 자매의 애증까지도 영화 속에서 그리 잘 살아 있다고 볼 수 없어요.
어스: 워낙 숨가쁜 엎치락뒤치락하는 사건이니까요. 사실 연속극이 맞는 포맷일지도 몰라요.
헬프: 분명 스피디한데도 지루한 면모가 있거든요.
어스: 원래 지루함은 느림에서 오는 게 아니라 리듬감의 부재에서 나오거든요. ^.~
헬프: 내털리 포트먼이나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도 그냥 그랬어요. 이건 뭐, 거의 콩쥐팥쥐 같더라고요.
어스: 많이 닮았다는 평을 듣는 키라 나이틀리와는 반대라 좀 신기한데 내털리 포트먼은 사극은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합니다. 차라리 <스타워즈> 같은 SF가 나아요.
헬프: <스타워즈>에서도 그리 훌륭하진 않았어요.
어스: 내털리 포트먼의 팬들은 <천일의 스캔들>보다 이미 극장개봉이 끝났지만 <다즐링 주식회사> 앞에 붙은 <호텔 슈발리에>를 찾아보시길 권해요. (DVD에도 첨부되겠죠?) 최근작 중 제일 멋진 모습이었어요.
헬프: 일단 저부터 조언 접수하겠습니다. 자, 이제 정말 메신저토크를 끝낼 시간이 됐군요. 마지막 토크의 첫 영화로 <어웨이 프롬 허>를 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스: 천일을 채우지 못하고 헤어지게 됐네요. 그동안 독자 여러분이 읽어주신 덕분에, 선배와 대화를 통해 많이 배웠고 무엇보다 부지런히 새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일한 이래 가장 많은 신작을 본 한해가 아니었나 싶어요.
헬프: 뜻이 잘 통하는 대화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얼마나 즐거운 경험인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어요.
어스: 두 사람이 영화 보는 눈이나 코멘트가 비슷하다는 지적도 많이 받았는데, 서로 더 물들기 전에 일단 헤어지고, 시간이 흐른 뒤 어떻게 변했나 다시 확인해보아요.^0^
헬프: 언젠가 더 훌륭한 분들이 메신저토크를 맡아주시길 기대하면서, 이제 그만 물러갑니다.
어스: 잠깐요, 쫑파티 해야죠.(*이모티콘 중 케이크와 와인잔) 자, 건배!
헬프: 메신저 밖에서 날 잡아요. 오랜만에 얼굴 보면서 영화 얘기할 수 있겠네요. ^0^
어스: 앗, 마지막으로 문의해주신 무수한 독자들께 다시 확인 드리겠습니다. ‘메신저토크’는 메신저로 진행한 것, 맞습니다.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