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색 형광등 불빛이 화사하게 쏟아지는 골목길, 두 사내가 마주선다. 선후배 사이인 이들은 다음날 한 기업의 최종 면접을 앞두고 있다. ‘취업’이란 두 글자 앞에서 선후배간의 의리와 관용은 없다. 선배는 임신 8개월인 아내까지 동원해 “한번만 양보해달라”며 애원하고, 후배는 “선배, 취했어?”라며 매정하게 돌아선다. 다급해진 선배는 후배를 납치해 수면제를 먹이고는 지하철에 버려둔다. 면접시간이 다 되어 의식을 되찾은 후배는 추리닝에 슬리퍼 차림인데도 ‘본능적으로’ 회사를 향해 달린다. 이것이 ‘무직’인 그들이 ‘취업’이란 무지개를 좇는 방식이다.
<무직의 무지개>는 코미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마냥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작품이다. 구직자들간의 경쟁의식과 면접에 대한 두려움, 스스로를 향한 자괴감 등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이 엉뚱한 상황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이처럼 영화 속 에피소드가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건 신승철 감독이 ‘잘 듣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먼저 말하기보다는 잘 들어주는 편”이라 칭한 신 감독은 <무직의 무지개> 또한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선후배가 면접을 같이 봤는데 선배가 떨어져서 홧김에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대요. 그 선배는 나이가 많아서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거죠. 이런 현실을 비틀어서 얘기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또 감독 자신도 국민대학교 연극영화과를 갓 졸업하고 막 구직의 세계로 눈을 돌린, ‘88만원 세대’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친구들의 생생한 경험이 영화의 자양분이 된 셈이다.
신승철 감독의 영화 인생에는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코미디’와 ‘여자친구’. 학창 시절 그에게 코미디는 생활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축제 때면 어김없이 무대에 올라가곤 했던 신 감독은 “<찬찬찬>이랑 만화주제가를 믹싱한 곡에 맞춰 고무장갑을 끼고 춤추던” 튀는 소년이었다. 여전히 “코미디 말고 다른 장르는 생각할 수 없다”는 그에게 영화란 “배꼽 잡고 웃지 않더라도 몰입하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 때문인지 신 감독의 전작에는 시선을 고정시킬 만한 엉뚱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늘 영웅에게 지는 악당과 그 악당을 지지하는 대학생(<역전의 악당>(2003)), 등을 돌린 채 뒤로 총을 쏘아 풍선을 맞추는 기인(<110% 사나이>(2006)), 한 여자와의 소통에 실패한 뒤 자신의 몸속에 버튼을 만드는 남자(<트니트니>(2006))가 그들이다. 캐릭터로부터 재미와 아이러니를 동시에 이끌어내는 것이 신승철 감독의 목표이자 그의 영화가 추구하는 매력이다. 다음 작품에선 ‘기 수련원’ 사람들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라고. 이처럼 독특한 캐릭터와 이야기를 완성하기까지 여자친구의 도움이 컸다. 신 감독과 함께 <무직의 무지개> 시나리오를 맡은 그의 여자친구는 7년 동안 단소리 쓴소리 가리지 않고 조언해주는 영화적 동반자다. “저희가 시나리오 하나는 정말 꼼꼼하게 쓰거든요. 이 영화도 시나리오 완성하는 데만 6개월 걸렸습니다. 같이 앉아서 싸우면서 시나리오 쓰고…. 서로 정말 냉철하게 조언하기 때문에, 좌절도 많이 합니다. (웃음)” 인터뷰 당일도 자리에 함께한 그녀는 신 감독이 망설일 때마다 똑 부러지는 발언으로 대답을 도왔다. 기대되는 시네 커플의 출현이다. 자신의 영화를 “가내수공업”이라 부르는 신승철 감독은 아직 타인의 시선에 작품을 노출시키는 것이 낯설다. 졸업하고 나서 처음으로 ‘젊은 영화제’에 출품한 <무직의 무지개>가 덜컥 비경쟁작 부문에 선정된 것이나, 상상마당에서 2월의 우수작으로 뽑힌 것도 여전히 실감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청년의 이어지는 말을 들으니, 유명세나 타인의 주목은 그가 좋은 영화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활체육’이란 말이 있잖아요. 체육이 업이 아니지만, 늘 꾸준히 하는 거요. 저도 ‘생활영화’를 찍고 싶습니다. 계속해서 꾸준히 찍을 예정이에요.” 그의 이어지는 필모그래피를 주목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