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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클럽]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유럽영화제에 비해 비효율적인 티케팅 시스템을 갖춘 아시아의 영화제들

지난해 11월 그리스의 테살로니키국제영화제는 새삼스레 잊고 있던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경험이었다. 영화제에 가는 것이 다시 즐거움으로 다가온 것이다. 호텔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허름한 극장들에서 나는 하룻동안 예닐곱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린 것은 일본 거장 감독 나루세 미키오와 말레이시아 야스민 아마드의 회고전이었지만, 나는 주로 남아메리카영화와 이 영화제의 최대 강점인 동유럽 최근 영화들을 보았다. 그 지역 영화들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것이 없어서 영화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른 채 제목, 줄거리와 포스터가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보고 뭘 볼지를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보게 된 최고 영화는 폴란드에서 온 시적인 성장영화 <속임수>(Tricks)와 세르비아에서 온 심리스릴러영화 <함정>(The Trap)이었다. 이 영화들은 정말이지 그때그때 자유롭게 내린 결정들을 통해 얻게 된 수확물들이다. 이런 실험적 시도가 가능했던 이유는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허락해준 자유로운 티케팅 시스템 덕분이다. 영화가 맘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걸어나와 30분 뒤에 시작하는 다른 영화를 보면 됐다.

최근 다녀온 홍콩영화제는 프레스나 게스트들에게 따로 티켓을 할당하지 않는다. 프레스나 게스트 배지가 있으면 다른 관객이 들어간 뒤 남은 좌석들에 앉을 수 있다. 표가 매진되는 영화는 극소수이므로 꽤 괜찮은 시스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 입장을 위해 기다리는 동안 때로 영화의 첫 부분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른 게스트들 말로는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영화의 처음 10분을 놓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영화제에서 쓰인 영화 리뷰들이 뭔가 혼선을 빚고 있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녀>

아시아의 영화제들은 대개 엄격하게 짜인 틀에 따라 하루에 네편 내지 다섯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어쩌다 점심을 좀 천천히 먹어서 오후 3시 상영을 놓치면 다음 영화를 보기 위해 오후 6시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행여 6시 직전에 급한 전화를 받아야 해서 그 회의 상영을 놓치면 대개의 아시아영화제들이 열리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쇼핑센터를 9시인 다음 상영 때까지 하릴없이 돌아다녀야 한다. 표는 반납하거나 교환할 수 없으며, 스크리닝을 놓친 것에 대해 벌칙을 받기도 한다.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양치기라면 우리는 그들의 지시대로 움직여야 하는 양들인 셈이다. 이것은 아시아와 유럽의 최고 영화제들간의 근본적 차이를 보여준다. 유럽영화제들은 영화적인 발견을 장려한다. 나는 1998년의 베를린영화제에서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갑자기 생긴 빈 시간 덕에 우연히 볼 수 있었다. 그 뒤 석달이 못 돼 나는 한국영상자료원의 도움을 얻어 런던에서 김기영 감독의 영화 여섯편으로 회고전을 열었다. 내가 그때 우연히 보게 된 영화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였고, 그런 우연이 가능했던 것은 배지만 있으면 그냥 들어가서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베를린의 편안한 운영 방식 덕분이었다.

아시아의 영화제들은 무엇이 우선인지 다시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들은 박스오피스 수입의 극대화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하는 관료제적 효율성으로 짜인 장소들이 되고 있다. 관객은 자신들의 스케줄을 인터넷에서 몇주 전에 미리 예매해야만 하고, 미리 프로그램된 자동 인형들처럼 움직여줄 것을 요구받는다. 영화제를 방문한 저널리스트들이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표들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DVD 플레이어가 놓인 몰개성한 방들에서 시간의 반을 보내야 하는 일은 오직 아시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관객이 영화제의 최우선적 고려 대상이 아니라 수익을 내주는 불편한 존재들로 전락한 것이 언제부터란 말인가?

번역 이서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