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 진보! 대화!’의 슬로건을 내건 인디다큐페스티발이 올해에는 장소를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로 옮겨 3월28일부터 4월3일까지 관객을 찾아간다. 국내 신작전 13편(단편 3편, 장편 10편)과 해외 신작전으로 꾸려진 올해의 초점 9편(단편 3편, 장편 6편)을 통해 이미 국내에서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들과 국내외 프리미어 작품들뿐만 아니라 해외 다큐멘터리의 경향도 확인해볼 수 있다. 개막작으로는 대추리의 마지막 농민들을 찍은 김준호의 <길>(2008)이 프리미어로 상영되며 폐막작은 홍콩의 빈곤한 가정들의 새해맞이를 찍은 킹 와이 챙의 <모두들 안녕하십니까>(2007)가 상영될 예정이다. 여전히 전작이 무료상영으로 진행되고 지체장애인들을 위한 좌석과 몇편의 영화에 한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화면해설,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상영이 제공된다. 자신의 터전을 빼앗기고, 일자리를 빼앗기고, 사람다운 권리를 빼앗긴 자들의 투쟁을 담은 작품부터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관계와 윤리에 대해 거듭 묻고 의심하게 만드는 작품까지 2008 다큐의 바다는 현실에 대한 용감한 발언과 다큐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넘실댄다.
<길> 감독 김준호/ 2008년
영화는 어느새 우리에게서 잊혀진 대추리의 기억을 다시 꺼내든다. 2006년 5월 정부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을 위해 대추리에 공권력을 투입한다. 대추초등학교는 무너지고 농민들이 몇 세대에 걸쳐 이룬 논과 밭은 마구 파헤쳐졌으며 그걸 바라보는 농민들의 마음은 찢겨졌다. 감독은 그날 이후 주민들의 삶을 취재하며 70대 노인이지만 여전히 건장한 농부인 방효태의 하루하루를 인터뷰한다. 매일같이 마을에 주둔하는 전경들과 싸우면서도 그는 여전히 생명을 피우는 자신의 땅을 찾아간다. 뙤약볕 아래에서 홀로 흙을 갈아엎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으며 철조망으로 뒤덮인 땅에 길을 만들어가는 노인의 고군분투는 애처롭기보다는 강인하고 숭고하다. 굉음을 내며 하늘을 나는 훈련 비행기와 논을 막아선 까만 전경들, 여전히 아름답게 저무는 노을과 그 가운데서 노동하는 노인의 그을린 육체가 대비되며 슬픔을 자아낸다. 그는 말한다. “농민은 어차피 그렇게 싸워야 해.” 마을 주민들과 지킴이들은 투쟁을 축제로 만들며, 땅에서 끝까지 노동하며 저항하지만, 결국 대추리의 오랜 평화는 깨지고 만다. 폐허가 된 집을 뒤로하고 낡은 트럭에 낡은 세간을 싣고 어디론가 떠나며 차마 땅을 뒤돌아보지 못하는 노인들의 쓸쓸한 얼굴은 잊혀지지 않는다.
<천막> 감독 김재영/ 2008년
지난 96년 ‘학습지 교사는 근로자로 볼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난 이래, 학습지 교사들은 여전히 노동자의 기본 권리조차 무시되는 환경에서 싸우고 있다. 이들은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기본보험, 복지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심지어 회원 유치를 강요당한다. 그러나 회사는 노동조합에 가입한 교사들을 탄압하고 해고하는 방식으로 이들의 싸움에 대응하고 있다. <천막>은 부당 해고와 가압류를 통보받은 대교 눈높이 교사들이 회사 앞에 천막을 치고 길고 지난한 투쟁을 벌이는 과정을 담는다. 회사 앞에서 먹고 자며 일인시위를 하고 집회를 열어 노동 기본권 보장을 외치지만 회사는 용역 경비원을 내세워 이들의 목소리를 차단한다. ‘소비자가 뽑은 좋은 기업 대상’이라는 현수막이 이들의 천막 뒤에서 무심하게 나부낀다. 오랜 투쟁 과정에서 이들 내부에서는 다른 목소리로 인한 갈등과 피로가 묻어나지만, 결국 부당 해고자의 복직을 이끌어내어 학습지 교사 노조에 또 하나의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다. 그러나 여전히 또 다른 학습지 ‘노동자’들은 부당 해고당하고 유령회원 대납에 시달리며 싸움을 시작한다. 천막은 거둬지지 않는다.
<할매꽃> 감독 문정현/ 2008년
정신병으로 고단한 일생을 살았던 작은 외할아버지는 언제나 두려운 존재였다. 그의 죽음 이후, 감독은 그의 정신 병력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외가쪽에 숨겨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당도한 전라남도 산골의 어느 마을. 양반과 상민으로 두터운 벽을 쌓고 지내던 마을은 전쟁이 일어나자 좌익과 우익으로 나뉜다. 신분의 갈등이 이념 갈등으로 전환하면서 두 집단 사이에는 살인과 배신의 비극이 시작되고 그 골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좌익 운동을 했던 감독의 외할아버지, 작은 외할아버지 등 외가의 식구들은 ‘빨갱이’가 되어 살해당하거나 미치거나 스스로를 저주하며 일생을 보냈고 남은 가족들은 연좌제의 사슬 속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여전히 가족들은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거나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이 영화는 모멸과 망각을 강요당한 가족사에서 용서와 이해의 끈이 되고자 하는 젊은 세대의 기록이며 역사적 비극 한가운데서 모든 짐을 짊어지고 평생을 견뎌낸 외할머니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이자, 상처와 분노로 세월을 보낸 가족들이 자신들의 불행한 과거에 보내는 애도의 노래이다.
<버마, 평화를 위한 기도> 감독 맷 블라우어/ 2007년
버마의 깊은 산속, 원주민들의 마을은 버마군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버마군의 무차별한 살인, 방화는 마을을 언제든 초토화시킨다. 갓난아기를 업은 젊은 여인들과 힘없는 남자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가서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한다. 하지만 부족한 식량과 의약품으로 어린아이들은 병들고 죽어가고 있다. 영화는 이들과 구조대, 저항군이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버마군을 피해 정글 속에서, 정글을 헤치며 살아가는 과정을 찍는다. 여기에 한 남자가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이들의 위태로운 여정에 동참하며 말한다. “나는 이들의 목소리를 찍고 싶다. 나를 통한 목소리가 아니라, 이들이 자신을 위해, 자신에 의해 내는 목소리를 찍을 것이다.” 버마군은 자신들의 주장, 현실에 대한 왜곡된 발언을 전세계에 내보낼 수 있는 다양한 통로를 확보하고 있지만, 정글에서 정글로 이어지는 이들의 현실은 점점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사진기 대신 비디오카메라를 선택해야만 했다고 밝힌다. 우리의 존재에 무관심한 세상에 우리의 목소리가 살아 있다고 알려야 한다! 이것은 카메라가 존재하는 이유다.
<약쟁이 아롱씨> 감독 저우하오/ 2007년
기자 출신으로 마약중독자들을 밀착 취재하는 감독은 지독한 마약중독자 아롱씨를 알게 된다. 객관적 관찰자의 위치를 유지하던 감독의 카메라는 아롱씨가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그 위치가 조금씩 흔들린다. 우정을 빙자해 아롱씨는 마약을 그만두겠다는 거짓말로 감독에게 수차례 돈을 요구하고 그때마다 감독은 돈을 쥐어주지만, 감독 역시 아롱씨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찍고 찍히는 관계를 유지하다가 아롱씨가 말도 없이 연락을 끊고 사라지면 촬영은 중단된다. 그리고 위기에 처한 아롱씨가 도움을 청하며 감독을 다시 찾을 때 촬영은 시작되고 모든 과정은 반복된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촬영은 아롱씨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간 뒤 끝난다. 이 영화의 의미는 중국의 마약중독자들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보다는 카메라의 주체와 피사체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볼 지점을 던져준다는 점에 있다. 관찰자와 방관자 사이. 피사체에 대한 윤리. 카메라로 죽음을 찍을 것인가, 카메라를 끄고 죽음을 막을 것인가. 한 인간을 살릴 것인가, 현실을 고발할 것인가. 돈을 쥐어주고 그의 마약 같은 현실을 지연시키며 촬영의 기회를 더 얻을 것인가, 감히 카메라를 든 교화자가 될 것인가. 당신은 무엇을 위하여 카메라를 들었는가.
<Way Home> 감독 김경수/ 2007년
이것은 한대수의 12집 앨범에 수록된 다큐멘터리이다. 한 예술인의 심오한 인생철학이나 음악에 대한 깊은 변을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산만하고 가벼운 영화지만, 자유인 한대수가 내뿜고 마시는 자유로운 공기를 잠시 나누고 싶은 이들에게 적절한 영화다. 한대수는 거리를 걷고 사람들을 구경하고 술을 마시고 어느 작은 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심지어 자신의 데뷔무대를 진행했던 사회자를 만나 회포를 푼다. 긴 머리, 들썩이는 어깨, 그리고 유머러스한 화법, 기이한 웃음소리가 고독하고 흥겹다. 뉴욕에서 만난 아내 옥사나와의 결혼식 비디오도 삽입되어 있고 달파란, 장영규와 함께한 음악 작업실의 풍경도 있다. 무엇보다 이 다큐멘터리의 백미는 일명 대한민국 주부 여러분들을 위한 한대수의 “양호한” 요리 강습. 과연 얼마나 양호한지 확인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