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를 둘러싼 쉼없는 스캔들의 핵심은 앤 볼린이다. 첫 번째 부인과의 이혼을 종용하여 영국의 국교까지 바꿔버린 장본인이자, 왕의 짧은 애정이 끝난 뒤 버림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참수형에 처해졌던 비운의 요부다. 우리로 친다면 장희빈쯤에 해당할 텐데, 연극과 소설, 영화, TV시리즈로 부활한 횟수 면에서는 섬나라는 물론 세계 최고의 칭호도 아깝지 않다. 필리파 그레고리의 가상 역사소설을 원작 삼는 <천일의 스캔들>의 원제는 ‘또 다른 볼린가(家) 여인’. 앤 볼린 이전에 헨리 8세의 관심을 끌었다고 전해지는 메리 볼린을 일컫는다. 메리는 탐욕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치는 자업자득형 팜므파탈인 앤과 대조되는 순수의 화신이다. ‘좋은 전쟁’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로 ‘진실된 스캔들’은 불가능하지만, 수컷의 집착과 암컷의 계산으로 가득한 추문의 진창에도 더럽혀지지 않은 ‘고귀한’ 인물은 있었다는 가정하에 빚어진 캐릭터다. 숱한 판본의 헨리 8세 이야기 속에서 <천일의 스캔들>을 차별화하는 이 전략은 결과적으로 헨리와 앤과 메리 모두에게 별다른 이득이 되지 못한다. 얄팍하되 명료한 소프오페라식 갈등을 부각한 결과. 에릭 바나가 연기한 헨리 8세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하면 짜증을 내는 쪼잔한 왕으로 묘사됐고, 내털리 포트먼의 앤 볼린은 ‘헛똑똑이’ 캐릭터로 전락했으며, 스칼렛 요한슨의 메리는 이해 불능의 천사표가 됐다. 샌디 파웰(<갱스 오브 뉴욕> 등)의 의상은 역대 최고의 화려함을 자랑하고, HD카메라로 담아낸 화면은 고상한 시대극의 외향을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제아무리 화려한 스캔들도 치졸한 추문에 불과함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면, 제대로 짚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