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고종석이 기억하는 지구상 도시는 미국 댈러스에서 모로코 탕헤르에 이르기까지 줄잡아 마흔두곳이다. 대개 여행기는 저자가 가본 곳을 되도록 탐스럽게 그려야 책 낸 명분이 선다는 강박을 갖기 십상인데 <도시의 기억>은 그런 면에서 덤덤하고 때론 쌀쌀맞다. 일본의 나라, 스페인의 아랑페스,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그리고 저자가 서울 외에 지그시 눌러 산 유일한 도시 프랑스 파리 정도가 개중 고종석이 홀딱 반한 도시이겠거니, 독자가 눈치껏 넘겨짚을 따름이다.
서문에 미리 이른 대로 <도시의 기억>은 젊은 보헤미안의 무용담도, 그 나라에 살아보니 어떠하더라는 이주자 수기도, 예술품 답사 지도도 아니다(혹은 그 셋의 개성적인 종합이라 해도 적당하다). 이 책을 채운 에세이들은 저자가 그 도시를 누구와 함께 왜 방문하여 어떤 일을 했는지- 특히 무엇을 먹고 마셨는지!- 또박또박 밝힌다. 문화사에서 그 도시가 점하는 좌표와 한국인 여행자에게 호소하는 바도 꼬박꼬박 언급된다. 때로는 그곳의 주민이 아닌 이방인과 만나 겪은 일들이 해당 도시에 관한 추억의 태반을 차지하는 글도 있다. 예컨대 오사카 편은, 학술대회를 취재하러 간 젊은 날의 저자가 경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겸연쩍은 첫 만남의 추억이다. 고종석의 책답게 <도시의 기억>은 여행의 곤한 발걸음 속에서도 언어학적 사색과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한 도시를 내부자와 외부자가 달리 부르는 여러 이름(도이칠란트/독일처럼)에 대한 설명이나 다이글로시아(한 사회에 통용되는 두 언어가 사회적 기능과 위세에서 층이 지는 경우)에 대한 생각을 써내려간 대목이 그러하다.
고종석의 여행기는 이국의 풍경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려는 절제이자, 그것을 한낱 일화가 아닌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다. 하릴없는 낭만주의자이면서도 감상주의의 소아적 무책임을 경계하는 저자는 방종과 변덕의 향연인 여행이라는 행위 속에서도 자신의 원칙을 이방의 풍경과 경험에 번번이 문질러 테스트한다. 그것이 이 산문집이 어렴풋한 시론의 성격도 잃지 않은 한 까닭이다.
언제나 고종석의 책에는 흔히 쓰지 않으나 쓰임새가 실팍한 단어가 등장해 사전을 뒤적이게 하는데, 그 때마다 데면데면하면서도 덤을 얻어 챙기는 흐뭇함이 여전하다. 세상의 모든 도시를 관통하는 바람 길을 내듯 제호를 가장자리로 밀고 표지 가운데를 텅 비워버린 오필민의 표지 디자인도 시원스럽다. <도시의 기억>은 30년 전 저자의 펜팔이었던 어느 스페인 여성에게 헌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