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미천한 복원사(史)가 회복을 향한 또 다른 한 걸음을 내디뎠다. 현존하는 한국영화 최고(最古) 기록을 경신하는 안종화 감독의 극영화 <청춘의 십자로>(1934)가 발굴된 것이다. 2005년 3월 공개된 1938년작 <군용열차>가 최고작 기록을 10년 앞당기고, 2006년 3월 선보인 1936년작 <미몽>이 다시 2년을 단축한 지 2년 만에 이뤄진 쾌거다.
“마라톤 경기에서 1분을 단축하는 건 쉽지 않다. 우리 영화사 100년 중 복원 역사의 2년을 단축했다는 건 그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 3월4일 오후 2시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1관에서 진행된 <청춘의 십자로> 공개행사에서 김종원 영화평론가가 말했다. ‘기적에 가까운 발굴.’ 실로 그랬다. 단지 오래됐다는 것 외에도 <청춘의 십자로>가 한국 영화사와 복원사에서 지니는 의의는 무궁무진하다. 현존하는 유일한 무성영화에, 배우 출신 안종화 감독 작품 중 유일하며, 영상자료원이 보유한 유일한 오리지널 네거 질산염 필름이기도 하다. 최근 몇년간 해방 전후 한국영화 발굴의 대부분이 해외 아카이브를 통해 이뤄졌음에 비해 무명의 국내 소장자가 연락을 취해 시작된 이번 발굴은 그 방식도 극적이다.
오래된 영화임에도 돋보이는 현대적인 재미와 스타일
무엇보다 <청춘의 십자로>는 재밌다. 상경한 남매의 우여곡절 서울생활, 떨리는 사랑과 배신과 복수, 그리고 새 출발을 그리는데, 신파멜로에 액션물이면서 코미디다. 영화는 서울역에서 소일하던 영복(이원용)의 회상으로 시작한다. 시골에서 데릴사위로 일하던 영복은 아내가 될 계순이 동네 불량배에게 정절을 빼앗기자 상심하여 고향을 떠나온 것. 서울에서 그는 두 친구와 어울리는데, 서로 장난을 걸고 영복을 응원하는 이들은 영락없는 코미디 감초 역할이다. 주유소에서 일하는 영희(김연실)가 영복에게 호감을 표하는 상황은 청춘영화를 연상시키고, 부유한 모던보이 장개철(박연)이 영복의 여동생 영옥(신일선)에 영희까지 희롱하는 과정은 도시에서 몸과 마음을 더럽히는 청춘 군상을 표현한 멜로물의 그것이다. 개철에게 분개한 영복이 개철의 집으로 향했다가 여동생까지 발견하고 복수를 위해 개철이 주최하는 연회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두들겨 패는 모습은 액션영화로 손색이 없다.
한국 영화사 공식 첫 번째 극영화인 1923년작 <월하의 맹서> 이후 80번째 극영화이자 1960년까지 12편의 영화를 만든 안종화 감독의 세 번째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는 스타일 면에서도 중요하다. 첫 번째 한국 발성영화는 1935년작 <춘향전>. 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의 정종화씨는 “발성영화 초창기에 만들어진 <미몽>은 녹음 등의 사운드 기술을 신경쓰다보니 촬영방식은 정적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무성영화 기술이 최정점에 달했던 시기의 특성을 형식적 완성도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기차 위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화면으로 시작한 영화는 영복의 모습을 따라 카메라가 이동하거나 줌인, 줌아웃이 아니라 트랙을 사용한 무빙을 선보이는 등 멜로영화의 틀을 갖춘 영화치고는 화면 자체가 역동적이다. “이명우씨의 촬영은 고심한 자취가 많다”거나 “과거의 조선영화에 비해 특색있는 수법을 발견할 수 있으리니 이것이 안종화씨의 열성이고 진취일 것”이라는 1934년 9월 개봉 당시 <조선일보>의 기사로 미루어 다른 무성영화에 비해 눈에 띄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무성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간자막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듯 보이는데, 풍경이나 정물 인서트,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클로즈업의 활용이며 거울을 이용한 촬영 등이 <미몽>을 넘어선다.
배우와 감독의 면모도 중요하다. <청춘의 십자로>는 나운규의 1926년작 <아리랑>의 여주인공으로 알려졌던 당대의 스타 신일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영화. 술집에서 불량스럽게 담배를 피우며 등장하는 그녀의 외모는 30, 40년대 영화를 통해 어느 정도 얼굴이 익숙한 여배우 문예봉(<미몽> <군용열차> 등)보다 현대적인데 이 영화는 신일선의 재기작으로도 중요하다.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는 주인공 이원용은 유도선수 출신으로 나운규의 뒤를 이어 일종의 ‘기획형’ 배우로 키워졌던 활극배우다. 정종화씨에 따르면, 한국영화 연구자들이 소중한 자료로 활용하고 있는 <한국영화측면비사>의 저자 안종화 감독은 해방 이후 충무로가 아닌 왕십리 주변에서 지인들과 함께 동인활동하듯 영화를 만들었던 인물이다. 신상옥 감독 등과 달리 충무로 주류의 계보에서 약간 비껴나 있는 이만희 감독 역시 안종화 감독의 연출작에 배우 혹은 연출부로 활동하면서 영화에 입문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극적인 복원 과정
지난해 7월 영상자료원이 한 필름소장자로부터 연락을 받고, 그가 소장한 필름이 안종화 감독의 1934년작 <청춘의 십자로>임을 확인한 뒤, 2007년 12월27일 복원작업을 완료하기까지의 과정 역시 흥미진진하다. 당사자의 요청으로 소장자의 실명을 공개할 수 없다고 밝힌 영상자료원 보존기술센터 장광헌 팀장은 “처음 필름을 확인했을 땐 질산염 원본 네거필름이라는 것 외에는 이 영화가 한국영화인지의 여부도 알 수 없었다. 필름이 공기에 노출되면 심각한 훼손이 진행되기 때문에 함부로 열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총 9개의 롤을 담고 있는 각각의 캔에는 <세동무>(1928), <무지개>(1936), 심지어 <아리랑>(1926)이라고까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제목 확인을 위해 필름 일부를 스틸로 전환한 뒤 몇명의 전문가가 남아 있는 사료와 다른 영화의 스틸 등과 비교하여 <청춘의 십자로>라는 결론을 내렸다. 해방 직후부터 6·25까지 단성사를 운영했던 부친으로부터 해당 필름을 전달받았다는 소장자조차 “이후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소중하게 보관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셨을 뿐 어떤 영화인지는 말씀해주지 않았다. 아마도 <세동무>일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며 정확한 정보를 주지 못했다. 신일선, 이원용 등 동일한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고 기록된 안종화 감독의 1936년작 <은하에 흐르는 정열>이 아닐까 싶었지만, 감독 자신이 저술한 <한국영화측면비사> 속 줄거리를 바탕으로 유추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신일선을 비롯하여 <청춘의 십자로> 속 두 감초 역할 배우가 등장하는 스틸사진이 그간 <은하에 흐르는 정열>로 분류됐던 것이 밝혀지는 등 소소한 오류가 수정됐다.
국내 복원기술로는 불가능 판정을 받은 필름은 일본으로 특별 공수되어 복원과정을 마쳤다. 자료의 희귀성에 걸맞게 까다로운 협상결과를 거쳐 자료원 자료수집 역사상 최고가에 해당하는 수천만원의 보상가로 모든 권리를 양도받은 뒤 이뤄진 두달간의 복원작업이었다. 일본으로 필름을 옮기기 위한 특수포장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필름의 훼손 정도의 기준이 되는 수축도가 2.5%에 그쳤다는 점. 장광헌 팀장은 “통상 3% 이상이면 현존 복원기술로는 복원이 불가능함을 고려할 때 상당한 훼손도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이 시점에서 발굴됐다는 게 천만다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총 9개의 롤을 모두 복원하는 것은 끝내 불가능했고, 엔딩타이틀을 제외한 본편 8개의 롤 중 7개만이 복원됐다. 나머지 한롤은 소장자가 1960년대에 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1980년대 초 영상자료원이 한국필름보관소였을 무렵 찾아왔을 때 캔을 열어봤던 것 때문인지 완전한 부패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볼 수 있는 초당 18프레임을 기준으로 러닝타임 73분에 달하는 현재의 <청춘의 십자로>는 완본은 아니다. 관계자들은 자료를 토대로 유추할 때, 유실된 한롤이 순서상 영화의 제일 첫 번째에 해당하며 주인공 영복의 농촌 생활을 담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오는 5월 일반인에게 공개예정
<청춘의 십자로>는 영화 안팎으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품고 있다. 장광헌 팀장은 질산염 필름을, 그것도 오리지널 네거필름으로, 제대로 된 보관 환경을 갖추지 못한 개인 소장자가 그 오랜기간 동안 보존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한다. 극장을 운영했던 부친이 상영본인 프린트가 아니라 촬영 직후의 버전인 네거필름을 전달했다는 것도 기이하다. 이에 대해 장광헌 팀장은 “당시에는 관객수익으로 대관료를 지불하지 못할 경우 그렇게 오리지널 네거까지 극장쪽에 저당잡히는 경우가 있었다. 다른 영화의 대관료 때문에 지불된 필름일 것”이라고 설명한다. 가장 신기한 건 현재 남아 있는 필름을 모두 이어붙인 <청춘의 십자로>가 몇몇 부분에서 NG장면이 반복되거나, 순서상 맞지 않는 컷이 끼어드는 등 편집단계 이전임을 보여준다는 점. 네거필름을 그대로 현상·인화한 뒤 포지티브 필름으로 만들어 편집을 진행한 뒤 완성하려 했을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현재 필름상으로는 영화의 컷 수에 비해 편집의 흔적이 현저하게 적다. 네거필름을 카메라에 넣은 뒤, 우리가 보는 순서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촬영이 진행됐다는 이야기인데, NG도 없이, 편집까지 정교하게 고려하여 그처럼 촬영하는 것이 가능할까. 게다가 카메라를 켜고 끄는 과정에서 미세한 빛이 흘러들어가게 마련인데, 그런 흔적도 별로 없다.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알 수 없다”는 반응이다. 당시 영화촬영과 후반작업 기술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으니 이는 아마 앞으로도 미스터리로 남을 전망이다.
모든 의문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로 인해, <청춘의 십자로>는 흥미롭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최고조에 달하기 직전이기에 오락의 속성에 충실한 영화로, 해방기 한국영화에서 흔히 엿보이는 친일의 흔적도 없다. 당대의 서울역과 주유소 풍경, 울창한 수풀에서 골프를 즐기거나 맥주 및 양주를 기울이는 상류층의 생활 등 1930년대의 미시풍속사를 엿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일반 관객과의 만남은 오는 5월9일 한국영상자료원 개관기념영화제로 예정되어 있다. 개막작으로 결정된 이 영화는 현재의 미완성 버전에 약간의 편집을 덧붙여 변사의 해설과 음악공연을 곁들여 보여질 텐데, 1930년대 사람들과 가장 근접한 분위기에서 영화를 만나기 위함이다. 개막작 상영을 포함한 개막 공연의 총연출은 김태용 감독이 맡는다.
관계자들이 바라보는 <청춘의 십자로>의 가치
영화평론가 조영정/ “<미몽>보다 이야기 자체가 짜임새있고, 화면도 훨씬 역동적이다. 한컷 안에서 무빙뿐 아니라 편집을 통해 화면의 사이즈가 눈에 띄게 일어나는 것도 흥미롭다. 원경에서 클로즈업으로 넘어가는 등 편집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대부분의 무성영화는, 혹은 초창기 발성영화인 <미몽>만 하더라도 고정숏이 주를 이루고 사이즈 변화도 별로 없는데, 이 영화는 굉장히 세련된 활력이 엿보인다. 장르의 정형성과 스타일의 모던함이 공존한다는 생경함이 영화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정종화/ “변사나 자막이 아니라, 이미지만으로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만듦새를 지닌 영화 같다. 무엇보다 이전에 발굴된 해방 전후 영화들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영화인들의 작품이었다. 안종화 감독은 국내 무성영화 붐을 타고 일제의 제작시스템이나 자본, 기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조선인들끼리 영화를 만들자는 기운을 불러일으켰던 <아리랑>과 같은 맥락에 있는 사람이다. 지금으로 치면 독립영화랄까. 그런 시대적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자 당대의 기술력이 집약된 작품 같다. 촬영감독 이명우 역시 당시 조선인 촬영기사로 가장 유명하고 기술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다.”
영화감독 김태용/ “<미몽> <반도의 봄> 등 비슷한 시기의 한국영화를 재밌게 봤고,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도 있고 해서 공부하는 마음으로 개막작 상영의 연출을 맡았다. 영화 자체가 재미도 있고, 미스터리가 많아서 흥미롭다. 피터 잭슨의 <포가튼 실버>처럼 옛날영화를 흉내낸 일종의 페이크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웃음) 발굴된 버전 그대로 상영하는 기회도 갖는다 하니 개막작 상영 때는 2008년의 판본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임하려고 한다. 실제 1930년대에도 상영하는 시기며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판본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더라. 당시의 다른 영화를 참고해서 편집을 다듬고, 변사 대본을 쓰고, 변사도 섭외해야 한다. 1940년대까지 영화 상영 앞뒤로 관객을 끌기 위한 별도의 쇼도 진행되는 등 일종의 연극적 흐름 속에서 영화를 관람했다니 그런 것도 들어갈 예정이다.”
용어소개
질산염 필름/ 질산염을 베이스로 사용하는 필름. 가연성과 폭발성이 높다. 한번 불이 붙으면 물속에 빠뜨려도 꺼지지 않을 정도. 영사기 안의 작은 마찰로도 점화 가능성이 높다.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 아저씨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던 것도 이 때문. 안전상의 이유로 현재는 아세테이트나 트리아세테이트를 필름베이스로 사용한다. 국내에서 질산염 필름을 사용한 것은 네거티브 필름은 1940년대까지, 포지티브 필름은 1950년대까지로 알려져 있다.
오리지널 네거/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의 줄임말. 필름을 카메라에 넣고 촬영한 직후 혹은 이를 현상한 버전을 말한다. 발견된 필름은 현상까지 이뤄진 상태였다. 오리지널 네거를 인화하여 포지티브 필름으로 만들어야 영사가 가능하다.
수축도/ 필름의 양쪽으로 줄지어 나 있는 작은 구멍을 퍼포레이션이라고 부른다. 퍼포레이션의 간격에는 일정한 규격이 있는데, 필름이 오래될 경우 이 간격이 조금씩 줄어들어 전체 필름을 뒤틀어지게 만든다. 이 간격이 수축된 정도는 필름 훼손 정도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퍼포레이션 간격의 변화를 미세하게 반영하여 필름을 감을 수 있는 장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