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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혜] 휩쓸리지도 머무르지도 않으리

<허밍>의 배우 한지혜

솔직해지자. 지금 현재 한지혜를 떠올리는 단 한컷의 장면이 있다면 일일드라마 <미우나 고우나>가 아니라 <야심만만>의 한 장면이다. 갑작스런 상황극을 통해 연인의 손을 잡은 남자는 “이 여자가 내 여자”라고 외쳤다. 그에게 손을 잡힌 여자는 차마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글썽였다. 본 방송에서는 몰랐던 부분이 자료화면으로 다시 비쳤을 때, 프로그램 제작진은 기어이 화면을 확대하며 그녀의 눈물을 포착했다. 사실 그때 이미 우리는 사랑하고 있었어요. 신변잡기의 대화로 웃고 떠들던 게스트와 시청자들이 그들을 어여쁘게 바라봤다. 그리고 한지혜라는 여배우의 가상과 실재가 오롯이 겹쳐올랐다. 그녀가 연기해왔던 여자들, 그러니까 오랫동안 사랑해오던 남자에게 동생 이하도 이상도 아닌 여자였던 <여름향기>의 정아와 사랑하는 남자에게 “빈티가 난다”고 구박받던 <비밀남녀>의 영지, 그리고 괴팍과 호감을 넘나드는 남자친구의 변화무쌍한 모습에 어리둥절하던 <B형 남자친구>의 하미가 남몰래 흘렸을 법한 눈물이 함께 보였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녀는 쏟아지는 뭇 남성들의 연정을 피곤해하기보다 사랑받지 못해서 혹은 그 사랑을 인정받지 못해서 고민했던 것이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170cm, 47kg란 가공할 신체조건(네이버 기준)과 슈퍼모델이란 화려한 타이틀로 연기 세계에 발을 디뎠음에도 그녀에게는 측은한 표정이 먼저 보이곤 했다. “비수를 꽂으시는군요. (웃음) 아무래도 제가 그리 미인상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아요. 올리비아 허시 같은 배우들처럼 첫눈에 반할 만한 외모를 가진 건 아니잖아요. 쌍꺼풀도 없는 평범한 생김새죠. 오히려 그래서 보통 여자들이 겪을 만한 고민들이 저에게 어울렸던 건 아닐까요? (웃음)”

그런데 또 딱한 여자다. 영화 <허밍>에서 그녀가 연기한 미연은 2000일째 열애 중이다. 하지만 한때 담배 살 돈을 아껴서 미연에게 선물을 사다 바치던 연인 준서는 점점 그녀의 열정을 두려워한다. 분명 미연이 친구였다면 머리라도 한대 쥐어박았을 것이다. 으이그, 미련한 기집애. 그러나 “사랑해”라는 말을 민망해 하지 않는 미연의 열정은 아직도 차고 넘친다. 담배를 좋아하는 남자친구의 몸이 행여 상할까 싶어 사탕을 채워주고, 공부만 하는 그의 건강을 생각해 함께 운동을 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그의 방을 청소해주는 미연은 마치 전생에 준서에게 지었던 죄를 사하려는 듯 보일 정도다. “좀 유치해 보이나요? 하지만 요즘에는 너무 센 영화만 있잖아요. 제가 향수를 느낄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히려 그런 모습이 예뻐 보이기도 할 것 같아요.” 설마 되로 주고 말로도 받지 못하는 이 여자가 본인의 모습 그대로일까. “네. 사실 제가 미연이 같은 성격이에요. 그래서 연기를 하면서도 공감하는 게 많았어요. 준서라는 캐릭터가 밉지도 않았고요. 아, 그래서 제 친구들이 저를 싫어하는 걸까요? (웃음)”

물론 그녀가 언제나 측은해 보이기만 했던 건 아니다. 친구들과 함께 클럽 가기를 좋아했던 부잣집의 철없는 막내 딸(<낭랑 18세>)이기도 했고, 나이 많은 언니들 앞에서 젊음과 당당함을 과시하던 얄미운 여자(<싱글즈>)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런 모습이 슈퍼모델 출신의 여배우에게는 그럴싸한 이미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당시 사람들이 그녀에게 바라는 이미지와 자신은 벗어버리고 싶은 이미지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었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그 나이의 여자애에게 있을 법한 끼를 가지고 연기했죠. 그런데 이후 더이상 보여줄 게 없는 거예요. 그때는 저도 저에게 정말 질렸었어요.” 영화와 미니시리즈의 주연배우란 위치에서 신인배우의 등용만으로만 여겨지던 일일드라마를 선택했던 것도 그녀 혼자 감당했던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굳이 저에게 주어진 기대를 애써 벗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어요. 명랑발랄하든 딱해 보이든…. (웃음) 연기를 잘할 수 있으면 제가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든 봐주시는 분들이 저의 변화를 눈치채주지 않을까 싶었죠.” 그리고 6개월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그녀는 매일 같이 쏟아지는 드라마 대본과 순발력을 요구하는 스케줄을 겪었고, 많은 기대를 받아온 자신의 사랑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녀는 요즘 자신의 가슴에 뭔가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아픔도 많고, 슬픔도 많고, 또 그만큼의 행복도 많다고. 이제는 그런 복잡한 감정들을 더 많이 드러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이제는 언제나 사랑받는 여자주인공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아요. 오히려 너무 아파서 강해지고 독해지는 여자 역할들이 탐나죠.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제 자신을 잘 지키고 싶어요. 휩쓸리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았으면 해요.” 그럼 혹시 새로운 연애는? “아니요, 지금 저는 더 성장하고 싶을 뿐이에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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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리스트 안미경, 한비·헤어&메이크업 김영주, 서희영(제니하우스 3호점)·의상협찬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 쇼룸, 토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