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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할 정도로 가볍고 퇴행적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왕가위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어느 신인감독의 습작을 보는 듯하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화양연화>도, <해피투게더>도 아닌 13년 전쯤 보았던 <중경삼림>에 대한 기억을 더듬게 만드는 영화다. 풋풋한 왕정문이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틀어놓고 짝사랑하는 양조위를 물끄러미 쳐다볼 때, 금성무가 파인애플을 사모으며 애인을 기다릴 때, 자기 세계 안에서 점점 부푸는 이들의 사랑에는 감상적인 면이 적잖았지만 거기에는 매혹되고픈 고독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보면서 새삼 그 당시의 감정을 떠올린다. ‘현실이 너무 빠르게 변한 걸까, 왕가위의 세계가 멈춘 걸까.’ <중경삼림> 때보다도 노골적인 감상주의자의 길을 걷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왕가위의 필모그래프 중 잠시 쉬어가는 페이지일 뿐이라고 애써 위안하고 싶은 영화다.

2007년 칸영화제 개막작이었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왕가위가 주드 로, 노라 존스, 레이첼 바이스, 내털리 포트먼 등을 데리고 미국에서 찍은 첫 장편이다. 엘리자베스(노라 존스)는 실연의 슬픔을 안고 전 남자친구가 새로운 여자와 방문했던 카페에 들른다. 그리고 남자친구의 집 열쇠를 주인인 제레미(주드 로)에게 맡긴다. 제레미의 항아리에는 주인을 잃고 주인을 기다리거나 그대로 버려진 열쇠들이 한 가득이다. 엘리자베스는 매일 밤, 이 카페에 들러 자신처럼 그 누구의 선택도 받지 못하고 남겨진 블루베리 파이를 먹는다. 제레미는 그녀와 점점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어느 날 갑자기 여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아무 말 없이 뉴욕을 떠난다. 영화는 제레미의 카페가 있는 뉴욕에서 시작해서 멤피스와 네바다로 이어진다. 낯선 도시에서 맞닥뜨리는 상황들,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의 이야기는 발신지없는 엽서가 되어 제레미에게 도착한다. 제레미는 여전히 카페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엘리자베스는 이곳저곳의 바와 식당에서 일하며 사람들을 관찰하는 가운데 자신을 돌아본다.

이 영화에는 분명 왕가위의 인장이 넘쳐난다. 허름한 카페와 도시의 고독한 기차소리, 인물들의 메마른 내레이션, 그리고 창밖에서 안을, 안에서 밖을 마치 멈춘 시간 안에서 응시하는 듯한 카메라가 그렇다. 크리스토퍼 도일이 다리우스 콘지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왕가위의 화면은 특유의 속도와 리듬에 인물들의 풍경을 맡겨둔다. 무엇보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의 내면과 발걸음과 뒷모습과 손길 등을 감싸안으며 영화에 깊은 흔적을 남기는 음악은 여기서도 귀에 감긴다. 주연을 맡은 노라 존스는 자신의 앳된 얼굴과 상반되는, 마치 수많은 세월과 이야기를 품은 듯한 보컬로 영화의 빈구석을 메우기 위해 애쓴다. 극 중 엘리자베스 역을 맡은 이가 노라 존스라는 정보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둘을 일치시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처럼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표면상 지극히 왕가위다운 영화라고 볼 수도 있지만, 왕가위의 이름에서 시청각적 충족감 이상의 기대를 품은 이들에게는 의아할 정도로 가볍고 퇴행적인 느낌의 영화다. 사랑과 성장에 관련된 전형적인 상징들을 끌어와서 거기에 진지하고 심각한 의미를 거듭 부여하려는 시도는 어쩐지 낯간지럽다. 대사의 뉘앙스가 영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표피적으로 변해버린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꼭 그것만이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사랑과 성장을 로드무비의 형식으로 다루는 이 영화의 태도는 사춘기 소녀의 일기장에서 종종 발견되는 낭만에 치우친 미성숙한 도취, 딱 그 정도에 머물러 있다. 이를테면 주인 잃은 열쇠들, 아무도 먹지 않는 블루베리파이, 어느 날 갑자기 떠난 여행의 의미,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사연 등이 어떤 틀 안에서 필요 이상의 무게를 품고 배열, 설명된다. 이러한 장면들은 현란한 뮤직비디오의 감각을 지녔지만, 막상 보는 이의 감정 속으로 융화되지 못한다. 다른 경우였다면 마음을 흔들고 말았을지도 모를 노라 존스의 보컬과 다리우스 콘지의 촬영이 그저 과잉처럼 반복 소모되고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왕가위를 흠모한 나머지, 그의 껍데기라도 기꺼이 뒤집어쓰고자 하는 어느 신인감독의 데뷔작을 보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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