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파리의 공항이다. 끝은 서울의 집이다. 그 사이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었다. 감독은 ‘화가 김성남의 34일의 감정 기록’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러니까 그 남자는 파리의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다 결국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의 두달간의 여정은 그 자체가 긴 꿈 같다. 하지만 그는 정녕 귀환한 것일까? 집에 돌아온 그가 지난 한달간의 기묘한 꿈에서 마침내 깨어났는지, 집으로 돌아온 사실이 행여 또 다른 꿈은 아닌지, 혹은 집에 와서 그가 꾼 꿈은 무엇을 보여주고자 함인지 잘 모르겠다. 아내는 돌아온 남편이 잠을 자며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자, “그건 꿈 아니야”라고 다그친다. 남자는 “그건 그냥 꿈이야”라고 대답한다. 꿈과 꿈이 아닌 것 사이. 혹은 몽상과 이상 사이. <밤과 낮>은 그 ‘사이’에 있으며,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160분 동안 그 ‘사이’를 함.께. 흐른다는 것이다. 이 여행은 행복하고 두렵다.
홍상수의 영화는 대체로 길 위에서, 때로는 고단하고 무력한 표정으로, 때로는 어떤 결단의 표정으로 불현듯 끝나곤 했다. 그래서 어찌되었든 집에서 마무리되는 <밤과 낮>의 엔딩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허문영은 집에 돌아오건 말건, 결국 중요한 건 인물의 여행이 원래의 자리로, 원래의 상태 그대로 돌아와 멈춰질 수 없음을 깨닫는 일이라고 했다(636호). 아무것도 끝난 것은 없다. 그래서 절망적이고 그래서 희망적이다. 파리가 아닌 서울을, 애인이 아닌 아내를, 꿈이 아닌 현실을, 여행이 아닌 집을 선택했다고 볼 수 없다. 좀 모호한 말이지만, 남자는 여전히 꿈결 같은, 그러나 정확히 꿈은 아닌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우연히 그 자리에 존재하는 물질들, 말들, 행위들이 우스꽝스러운 숭고함을 품고 번민한다. 그런 장면들은 감독 특유의 화법 때문에 정말 웃긴데, 웃다보면 이들의 번민이 어느새 마음에 우물을 만든다. 부질없는 농담으로 시작해서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감싸지다가 무엇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물질성으로의 하강. 그것은 추락이 아니고 고양도 아니며 말 그대로 밑바닥으로 끝까지 내려가 쳐다보는 것이다.
40대 유부남 화가 성남(김영호)은 함께 대마초를 피운 선배가 구속되자 파리로 도망간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에 묵으며 할 일 없이 그저 떠돌아다니던 그는 우연히 옛 애인 민선과 마주친다. 민선은 성남을 유혹하지만 성남은 넘어가지 않는다. 중래(<해변의 여인>)는 이미지와 싸우고 성남은 유혹과 싸운다. 그는 밤마다 아내와 통화하며 불안하다고 징징댄다. 그러다가 여자 유학생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유정(박은혜)을 만나게 되고, 사랑을 고백한다. 마침내 동침에 성공하고 유정 역시 마음을 열지만 성남의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그는 ‘돌연’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혹은 또 다른 여행으로 이행하기 위해 파리를 떠난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 갑작스런 결단에는 분명 의아한 구석이 있다.
알려졌다시피 이 영화는 더이상 대구의 구조가 아니라 일기체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약 두달간의 일기에는 자못 진지한 껍데기를 썼지만 코미디 같은 성남의 내레이션이 흩어져 있다. 성남은 구름을 그리는 화가다. 부유하는 구름과 방랑하는 성남, 뜬구름의 아련함과 모두가 뜬구름이라고 생각하는 삶의 어느 순간에 절실하게 밀착하며 뜬구름을 잡으려는 성남의 애달픔은 어딘지 유사하다. 그는 길게 혹은 짧게, 깊게 혹은 가볍게 다섯명의 여자들을 스쳐가지만, 그녀들은 동일한 여자의 약간의 변주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성남은 여자들에게는 더없이 무책임하지만, 생의 촉수를 함부로 짓밟지 못하는 민감한 수컷이다. 그는 생에 자기 나름의 예의를 지키려고 애쓰는 예술가다. 그리고 음악. 성남의 방랑에 불현듯 침입하는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은 불균질하게 흩어진 영화의 시공간과 인물의 내면에 더욱 불균질한 긴장의 깊이를 만들어 이들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행시키는 기이한 경험을 선사한다. 배우들은 ‘작은 기적’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