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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추격자의 절박함에 대한 깊은 공명

정석에 충실한 연출력으로 관객의 감정이입을 끌어낸 걸작 스릴러 <추격자>

그럴듯한 스릴러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의 스릴러라면 수수께끼에서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에게 위기가 닥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쫓긴다든지 누명을 뒤집어쓴다든지 이상한 음모에 휘말려드는 것이다. 여기서 긴장을 자아내는 것은 우선 수수께끼의 정체다. 주인공의 과거에는 무엇이 있을까, 악당의 정체는 무엇일까 등을 상상하는 관객에게 아슬아슬한 에피소드들이 계속해서 제시된다. 수수께끼에 많은 것을 의존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관객의 긴장을 유지해가는 것은 일반적인 스릴러의 공식이다. 최후의 반전에 집착하는 것도 그런 이유고. 하지만 스릴러는 수수께끼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야기의 앞뒤가 잘 맞아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서서히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중반 이후에 긴장감이 풀리지 않도록 교묘한 장치들을 적절하게 배치해야 한다. 스릴러를 만드는 것은 고도로 계산된, 그러면서도 감각적인 연출이 뒷받침되어야만 제대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세밀한 작업이다.

<추격자>는 그 세밀한 작업을 효과적으로 완수한 걸작이다. <추격자>가 택한 전략은 보통의 스릴러와는 조금 다르다. <추격자>는 직설적인 스릴러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관객은 지영민(하정우)이 살인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자들을 공급하는 보도방 사장인 엄중호(김윤석)는 그가 자신의 여자들을 팔아넘긴 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를 추적한다. 그를 만나러 간 미진(서영희)의 전화가 끊기고, 우연히 중호는 영민과 조우한다. 그리고 그를 쫓아가 잡는 데 성공하지만, 경찰이 나타나면서 일이 꼬인다. 중호에게 맞아 상처가 난 영민이 피해자라고 생각한 경찰은 그들을 파출소로 데려간다. 영민이 살인자임을 고백한 뒤에도 크게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중호는 외곽으로 밀려난다. 영민을 붙잡고도, 영민에게 모든 단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중호는 사건을 풀어갈 수가 없다. 중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진을 찾아야 한다.

범인도 있고, 진술도 있지만 정작 중요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무엇보다 중호는 경찰이 아니다. 중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반 시민이다. 중호가 원하는 것은, 일단 미진의 생사다. 미진이 잡혀 있는 영민의 집을 찾아야만 한다. 관객은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중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영민에게 물어보는 것도 불가능하고, 경찰은 엉뚱한 곳으로만 쏘다닌다. 미진의 집에 들렀다가 7살짜리 딸까지 떠안게 된 중호의 심정은 절박하다 못해 타들어간다. 이 답답함과 안타까움은 중호만의 것이 아니다. 미진이 처한 상황을 알고 있는 관객의 심정이 더욱 절박하다. <추격자>는 주인공보다 관객에게 더 많은 정보를 알려주면서, 관객이 영화에 정서적으로 개입하게 만든다.

<추격자>는 중호의 행적을 통해 관객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인다. 뭔가 수수께끼 때문에 궁금한 것이 아니다. 중호가 과연 미진을 찾아낼 수 있을까,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까에 모든 것이 맞추어진다. <추격자>는 하루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벌어진다. 자연히 정보량 자체도 많지 않다. <추격자>는 수수께끼의 단서를 하나 둘 던져주며 관객을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비밀을 어떻게 중호가 찾아낼 수 있는지에 주목하게 만든다. 수수께끼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절망적으로 단서를 찾아내려는 중호에게 응원을 보내게 한다. 중호가 정신없이 서울을 헤매고 다니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중호가 뛰어다니는 보조에 맞춰 관객도 함께 뛰어다니게 만든다. 스릴러의 관건은 수수께끼의 기발함이 아니라, 수수께끼를 둘러싼 사람들의 마음인 것이다.

살인범에 대한 천벌을 경찰에 맡길 수 없는 현실의 아이러니

<추격자>는 단지 관객의 마음을 졸이게 하는 게임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추격자>는 유영철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왔다. 수많은 여성과 노인을 죽인 연쇄살인범을 잡은 결정적인 이유는, 사라진 여성들을 찾으려던 업소의 주인들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들의 목적은, 중호와 마찬가지로 그 여성들이 사라짐으로써 입게 된 피해였을 것이다. 그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경찰보다 그들이 먼저 잡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의 아이러니다. <추격자>의 초반에 시장을 시찰하던 서울시장에게 똥을 던지는 시민이 나온다. 이 사건은 그냥 에피소드처럼 끼어들지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장의 경호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을 것을 우려한 경찰에서는 어떻게든 영민을 잡아넣으려고 한다. 그런데 증거가 불충분하다면서 이미 한번 영민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던 검찰에서는, 똥 투척 사건을 무마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며 다시 기각하려 한다. <추격자>에 나오는 권력집단이 우려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의 체면과 이익이 훼손되는 것뿐이다. 시민의 안전이나 당장 눈앞에 놓인 ‘보통 사람’의 목숨은 관심 밖이다. <살인의 추억>에도 비슷한 장면들이 나온다. 연쇄살인이 일어나고 있지만, 당시의 정권은 민주화운동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시골에서 몇명이 죽어나가건 그것은 정권의 안위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다. 21세기에 만들어진 <추격자>는 그런 세태가 여전하다고 말한다.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정권이 세워졌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권력집단의 목적은 자신들의 이익뿐이다.

경찰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우왕좌왕하는 동안 미진을 위해 뛰어다니는 사람은 중호뿐이다. 물론 중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중호는 전직 경찰이다. 뇌물 사건을 뒤집어쓰고 쫓겨난 중호는, 사회의 음지에서 법을 어기며 돈을 버는 인간으로 살아간다. <추격자>는 결코 중호를 선한 인간으로 그리려 애쓰지 않는다. 포주 노릇을 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좋은’ 인간으로 그리지 않는 것이다. 중호는 그저 세파에 찌든, 씁쓸한 과거를 지닌 인간일 뿐이다. 영민을 쫓아다니는 것도, 여자들을 찾거나 피해액을 되찾으려는 것뿐이다. 영민의 누나 집에 찾아갔을 때에도, 중호는 협박으로 돈을 뜯어내려고 할 뿐이다. 하지만 미진의 딸과 함께 서울 바닥을 훑고 다니면서, 영민 누나의 고통을 보면서, 중호는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 언제나 가슴속에 있었지만, 쉽사리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을 조금씩 바라보게 된다. 경찰에 알리지 않고, 영민과 최후의 대결을 벌이기 위해 찾아간 이유는 그것이다. 영민에게 필요한 것은, 이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집단의 형벌이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닌 사람들이 내려야 할 천벌인 것이다. <공공의 적>의 강철중이 분노를 느낀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도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정말로 나쁜 놈이 바로 영민인 것이다.

정석을 따라 만든 리얼리티 스릴러의 미덕

농촌 스릴러인 <살인의 추억>도 있긴 하지만, 대개 스릴러는 도시라는 공간에 잘 어울리는 장르다. 회색빛 도시의 익명성과 무심함에 어울리는, 차갑고 푸른빛이 감도는 스릴러에 중요한 것 하나는 공간의 이미지다. 영화를 보기 전에, <추격자>의 예고편을 봤을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좁은 골목길에서의 추격전이었다. 언덕 위에 집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면서 만들어진 좁은 골목길. 걸어 오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는, 굽이치는 골목길 안에서는 지금 자신이 어디쯤 있는지조차 알기 힘든 산동네. 그곳을 달리는 두 남자의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추격자>의 아우라는 느껴졌다. 이 세계의 축소판 같은, 미로 같은 산동네 골목길을 달리면서 겨우 잡은 영민에게서는, 아무런 실체도 만날 수 없다. 또한 영민의 주소지는 안양이지만, 그가 지금 기거하는 곳은 암울한 시대의 기운이 느껴지는 저택이다. 영민이 노부부를 죽이고 차지한 80년대풍의 저택은, 별다른 장치가 없음에도 대문부터 거실, 화장실까지 모두 을씨년스럽다. 그 공간 자체가 폭력의 상징처럼 그려진다. 김선일 사건으로 충격을 받았고, 그 폭력을 영화에 그리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을 듣고 나면 저택의 공간이 이해가 된다. 우리의 눈에 익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고급 주택은 연쇄살인범이 은거하는 공간으로 완벽하게 새로운 면모를 드러낸다. 좁은 골목길과 기괴한 저택의 모습은 섬뜩한 영민의 캐릭터와 맞물려 도시의 폭력성,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악마성을 공간의 이미지로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 느낌을 제대로 만들어낸 것만으로 <추격자>는 대단한 영화다. 또한 절박하게 요동치는 중호의 마음을 그려내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탁월하다. 엄마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안 딸이 차 안에서 울부짖고, 그것을 들으면서 운전하는 중호의 얼굴을 교차로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악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진하게 배어난다. 나홍진 감독은 스릴러의 기본적인 공식을 제대로 숙지한 것은 물론, 인물의 감정을 끌어내는 방법도 잘 알고 있다.

그동안 한국 스릴러의 치명적인 약점은 리얼리티였다. 한국 스릴러는 기발한 이야기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뒤에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공포영화도 마찬가지다. 엽기적이고 기발한 사건으로 시작하여 수수께끼만 던지고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니면 설정부터가 전혀 리얼리티가 없거나. 한국영화가 유난히 반전에 집착하는 것도, 허술한 이야기는 후반에 급격하게 무너지기 때문에 괴상한 반전을 넣어 관객을 놀라게 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니 전혀 설득력이 없는 반전이 등장하고, 오히려 모든 설정을 무너뜨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물론 스릴러에는 설정도 중요하다. 미국 드라마 <24>는 하룻동안에 벌어지는 사건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는 설정이 주효했다. 하지만 스릴러에 정말 중요한 것은, 기발한 사건이나 반전이 아니라 긴장감을 끌어내는 연출력이다. 데이비드 핀처의 <조디악>은 사건을 다큐멘터리적인 수법으로 따라가면서도 극도의 긴장감과 공포를 느끼게 한다. 설정은 기본 틀일 뿐이고 반전은 화룡점정일 뿐이다. 설정과 반전의 기발함만으로 스릴러를 구원할 수는 없다.

<추격자>는 설정의 기발함이나 놀라운 반전 대신에 정석을 따라간다. 쫓는 자는 오직 자신의 직분에만 충실할 뿐이다. 추격의 과정이 정말로 절박하고 안타깝다면, 관객 역시 공감하게 된다. 황망한 추격자의 심정에 공명하게 된다. 나홍진 감독은 무리하지 않고, 자신이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허세도 없고, 과시도 없다. <추격자>는 한국 장르영화의 데뷔작 중에서는 당연히 첫손에 꼽혀야 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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