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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미드·일드 가이드] 한국에서 방영 예정인 미드 미리 보기
씨네21 취재팀 2008-02-21

법정으로 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데미지> Damages

피범벅이 된 채 미친 듯이 거리를 헤매는 여자가 있다. 곧 그녀는 약혼자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다. 그리고 시곗바늘은 갑자기 6개월 전으로 돌아간다. 엘렌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로스쿨을 졸업하자마자 저명한 여성 변호사 패티 휴즈에게 스카우트되고, 의사 약혼자와 결혼을 설계하며 달콤한 미래를 꿈꾸는 중이다.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냉철한 완벽주의자인 패티 휘하에서 억만장자 프로비셔에 대한 민사재판을 준비하던 엘렌은 약혼자의 여동생 케이티가 사건의 핵심 증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증언을 하도록 케이티를 설득할 것인가, 아니면 그녀를 보호할 것인가 사이에서 갈등하던 엘렌은 패티가 케이티와의 관계를 이용하기 위해 자신을 고용했다는 데 의혹을 품게 된다.

독재자형 여성 상사와 신참 여직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법정 버전”이라는 제작진의 말은 <데미지>의 인물구도에 자연스레 적용된다. 하지만 명심할 것. 커피와 스테이크 심부름을 둘러싼 히스테리 대신 관객을 맞이하는 것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상대의 배에 칼을 박아넣는 섬뜩함이다. 적과 동지의 관계를 거미줄처럼 얽고, 살아남기 위해 영혼을 팔아치우는 인간의 추악함을 낱낱이 펼쳐놓는 <데미지>는 소름 끼치도록 냉혹한 동시에 관객의 두뇌를 농락할 만큼 명민하다. 매 에피소드를 깔끔하게 봉합하는 여타의 법정드라마들을 조롱하듯 치명적인 반전으로 인과응보의 판타지에 침을 뱉는가 하면,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긴장감으로 심장을 뒤흔들어놓는다. 드라마와 캐릭터, 연기까지 거의 모든 요소들이 흠잡을 데 없이 맞물려 최상의 화학작용을 발휘하는 <데미지>는 미드의 걸출한 장인들이 탄생시킨 또 하나의 걸작이다.

[TIP] <데미지>의 얼굴은 단연 패티 역의 글렌 클로즈다. 2005년 <쉴드: XX 강력반>에 이어 두 번째로 TV시리즈에 고정 출연한 그녀는 압도적인 연기로 올해 골든글로브 TV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뻔뻔하게 상류층을 엿보다

<가십걸> Gossip Girl

<베로니카 마스>와 <O.C.>를 함께 포장해 맨해튼으로 배송하면? 상자를 뜯으면 아마 <가십걸>이 튀어나올 것이다. 세실리 본지게사의 연작소설을 원작으로 한 <가십걸>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상류층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다. ‘퀸 비’(Queen Bee)로 불리며 인기를 독차지했으나 불현듯 사라졌다가 1년 만에 다시 학교에 돌아온 세레나, 그녀의 단짝이었으나 남자친구 네이트를 놓고 삼각관계를 형성한 블레어가 한축을 형성하고 세레나를 짝사랑하는 가난한(?) 중산층 소년 댄과 상류층에 섞여들기를 열망하는 동생 제니가 대구를 이루며 드라마를 엮어간다. <가십걸>은 그 제목 그대로 가십난을 장식할 만한 사생활이 시작이며 끝이다. 탄탄한 연줄로 사실상 아이비리그행 티켓을 거머쥔 이들의 관심사는 SAT 성적보다는 연애이고, 더 꼬집어 말하자면 누가 누구와 잤을까다. <가십걸>의 미덕은 ‘상류층 엿보기’를 그럴싸하게 감싸지 않고 아예 극의 설정으로 내세우는 뻔뻔함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익명의 가십걸(목소리의 주인공은 얄궂게도 ‘베로니카 마스’ 크리스틴 벨이다)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블로그, 휴대폰 등으로 실시간 전송하고, 자연스레 관객은 훔쳐보기의 공범이 된다. 우울할 때 호텔 바에 앉아 마티니를 홀짝이고, 아침에는 우아한 브런치를 즐기는 10대들. 씹거나 동경하거나, 즐거움은 매한가지다.

[TIP] 뉴미디어를 활용한 소비는 시리즈의 설정만이 아니다. 저조한 시청률로 신음하던 <가십걸>을 살린 것은 바로 아이튠즈. 다운로드 1, 2위를 달리는 뜨거운 인기에 힘입어 전체 시즌 계약을 성사시켰다.

I’ll be back to TV

<터미네이터: 사라 코너 연대기> Terminator: The Sarah Connor Chronicles

지난 2003년, 12년을 기다린 끝에 만난 세 번째 터미네이터는 재앙과도 같았다. 이 빠진 식칼로 뭉텅뭉텅 자른 듯한 줄거리는 물론, 작정하고 저지른 듯한 미스캐스팅은 시쳇말로 ‘안습’ 수준이었다(세월이 좀 흘렀기로서니 에드워드 펄롱이 어떻게 닉 스탈로 자랄 수 있냔 말이다). 당최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안 되니 <터미네이터3>는 차라리 안 만드는 게 나았다며 배신감에 치를 떤 팬들이 부지기수였으리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채 5년도 안 지나 스크린이 아닌 브라운관으로 그 배신감을 보상받게 되었다. 올해 초부터 <폭스TV>를 통해 방영되고 있는 <터미네이터: 사라 코너 연대기>는 <터미네이터2>의 스핀오프로 제작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3편에서 등장조차 안 했던 사라 코너. 2편과 3편의 중간쯤인 1999년을 배경으로 미래의 지도자가 될 아들과 함께 여전히 터미네이터에게 추격을 당하는 그녀의 이야기다. 린다 해밀턴으로 영원히 기억될 뻔한 사라 코너 역엔 <300>에서 스파르타의 여왕을 연기했던 레나 헤디. ‘에드워드 펄롱’의 포스를 계승해야 마땅할 존 코너 역은 <히어로즈>에서 클레어의 남자친구였던 토머스 데커가 맡았다. 터미네이터 역인 오와인 이오맨이 못 미덥긴 하지만 나름 성공적인 캐스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단 반응도 뜨겁다. 1월13일 미국 <폭스TV>를 통해 첫 방영된 파일럿이 지난 3년 동안 방영된 신작 오프닝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으니까. 무려 1830만명의 시청자를 TV 앞에 앉게 했으니 환영할 만한 컴백인 게 분명하다.

[TIP] 이 시리즈에서 코너 모자를 도와줄 터미네이터는 영화에서와 달리 여자다. 위장입학까지 하며 존 코너를 지켜주는 그녀의 이름은 다름 아닌 카메론. 완벽한 1, 2편을 만들었던 제임스 카메론에 대한 제작진의 오마주인 셈.

연애보다 커리어가 중요한 캐리 브래드쇼

<캐시미어 마피아> Cashmere Mafia

제목을 보고 누아르를 상상하셨다면, 얼른 생각을 거두시길. <캐시미어 마피아>는 기관총이 아닌 블랙베리로 무장한 직장여성들의 이야기다. 대학원 동기인 미아, 조이, 줄리엣, 케이틀린은 출판, 금융, 화장품 등 각자의 분야에서 중역의 위치에 오른 성공한 여성의 전형이다. 부와 미모를 양손에 쥔 그녀들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지나치게 뛰어난 능력. 약혼한 애인을 누르고 일을 따내는 탓에 파혼을 당하고, 일에 골몰한 사이 남편이 바람나기도 하지만 그녀들은 ‘캐시미어 마피아’라는 악명(?)을 얻을 정도로 단단한 연대를 통해 일상의 수난을 이겨낸다. 스토리 라인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캐시미어 마피아>는 <섹스 & 시티>의 복사판이며, 실제로 <섹스 & 시티>의 프로듀서인 대런 스타가 제작한 시리즈다. 한회에도 수차례 의상을 바꿔치기하는 미아(루시 리우가 연기했다)는 캐리를 쏙 빼닮았고, 아이 양육에 골치 썩는 조이는 미란다를, 레즈비언과의 관계를 탐험하는 케이틀린은 사만사의 피를 이어받았음이 분명하다. 다만 <섹스 & 시티>의 여인들이 제 짝 찾기에 몰두했다면, 이들은 연애에 목매기보다 커리어에 안테나를 세운다. “만약 블랙베리에 바이브레이터가 달려 있다면 내가 필요없을 것 아냐”라고 소심하게 항변하는 남자들을 제치고 그녀들은 전진한다. <섹스 & 시티>가 떠난 뉴욕 거리를 다시금 달구는 하이힐의 당당한 행진.

[TIP] <섹스 & 시티>를 함께하던 중 단단히 사이가 틀어진 대런 스타와 원작자 캔디스 부시넬은 맞대결을 하게 됐다. 2월에 미국 방영을 앞둔 부시넬의 <립스틱 정글> 또한 성공한 뉴욕의 직장여성들 이야기로, 대런 스타가 <캐시미어 마피아>를 한발 먼저 내놓은 것이 일종의 앙갚음일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기도.

스컬리-멀더? 그러나 독특한 형식의 수사극

<라이프> Life

12년 동안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남자가 있다. 그렇다면 그는 석호필처럼 탈옥을 시도할까? 답은 허무하게도 그냥 나왔어요, 다. 뒤늦게 무죄로 풀려난 그는 게다가 평생을 놀고먹어도 될 만큼 엄청난 보상금까지 받았다. <라이프>는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다가 다시 되찾은 형사 찰리의 출옥 뒤 행보를 뒤쫓는다. 캠핑장으로 써도 될 대저택에서 날마다 여자 손님들을 맞이하는 그는 수사에서만큼은 놀라운 직감을 발휘한다. 매사에 냉소적인 까칠한 여형사 리즈와 파트너를 이루어 사건을 해결하는 가운데, 그는 자신을 옭아맸던 12년 전의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라이프>의 특이한 점은 일반적인 수사물 구성에 12년 전 사건에 대한 다큐를 찍듯 관련자들의 인터뷰를 혼합시켰다는 것이다. 세월의 공백 탓에 카메라폰, 인터넷 메신저, GPS 등 ‘신문물’에 천진한 경탄을 연발하고, 형사보다는 셀러브리티(?)로서의 인기를 누리는 등 캐릭터의 독특한 설정들이 무난한 수사극 이상의 맛을 더한다. 스컬리-멀더 콤비를 연상시키듯 이성과 감성의 보완구도로 사건을 해결하는 찰리와 리즈의 아슬아슬한 궁합을 지켜보는 것 또한 적지 않은 재미다.

[TIP] 주인공 찰리를 연기한 것은 데미안 루이스로,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본 이라면 한쪽 입가를 슬쩍 올리며 미소 짓던 윈터스 소령으로 그를 기억할 것이다. 흠없는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루이스는 사실 영국 로열셰익스피어 극단 출신으로,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발탁됐다.

비밀요원이 해고당하면? 정답은 어수룩한 사립탐정

<번 노티스> Burn Notice

쫙 빠진 슈트에 번쩍이는 선글라스, 날렵한 권총에 첨단의 도청장치. 한마디로 폼나는 비밀요원이 ‘해고’당한다면? 결과는 처참하다. 월급이 끊기는 것은 당연지사, 은행 잔고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신용카드는 동결되니 하루아침에 노숙자 신세다. ‘퇴출 통보’를 뜻하는 제목의 <번 노티스>는 길바닥에 나앉은 비운의 스파이 마이클 웨스턴의 좌충우돌 분투기다.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쫓겨난 그는 퇴출의 배후를 추적하는 가운데 먹고살기 위한 방편으로 사립탐정 일을 시작한다. 총질을 하지 못해 안달난 옛 애인 피오나, FBI에 은근슬쩍 마이클을 팔아넘기는 친구 샘, 하루에 서른번씩 전화해 자잘한 부탁으로 속을 긁는 엄마 매들린이 합류하면서 모험(?)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치밀하고 긴박한 첩보물의 궤도를 멀찌감치 이탈한 <번 노티스>의 가장 큰 매력은 이처럼 나사가 반쯤은 풀린, 사랑스러운 느슨함이다. 선량한 심성 탓에 늘 의뢰인들의 개인사까지 뒷바라지해주랴 부산한 마이클은 카리스마로 무장한 마초맨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던 어수룩한 인간미가 넘쳐 흐른다. 의뢰인의 6살짜리 아들을 위한 학자금 저축을 놓고 범인과 협상을 벌이는 주인공을 보고 있노라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질 것이다.

[TIP] 미드를 꾸준히 챙겨온 이들에게 반가운 얼굴들. 주인공 제프리 도노반은 <몽크> <CSI: 마이애미> 등 미드의 단골 게스트였으며, 엄마 역의 샤론 글레즈는 <퀴어 애즈 포크>의 넉살 좋은 아줌마 데비, 파일럿 에피소드의 의뢰인은 <덱스터>의 앤젤 형사, 데이비드 자야스다. 하나 더, 마이클의 미덥지 않은 친구 샘은? 바로 <이블 데드> 시리즈의 브루스 캠벨이다.

원더우먼, 소머즈에 맞먹는 미모의 여전사

<네버다이 제인> Painkiller Jane

원더우먼과 소머즈의 계보를 잇는 초인형 여전사의 등장. <네버다이 제인>은 <히어로즈>의 클레어 베넷처럼 불사의 재생 능력을 가진 특수요원 제인 바스코의 사건 일지다. 범죄와 테러의 위험이 여전히 도사린 가까운 미래, 연방마약단속국 형사인 제인은 잠복수사를 벌이던 중 비밀 정부 기관에 투입된다. 그곳은 유전자 변이로 초능력을 갖게 된 ‘뉴로’들을 색출하고 격리시키는 이른바 뉴로 수사팀. 첫 임무를 수행하던 제인은 40층에서 추락하며 ‘파일럿에서 주인공 사망’(!)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는 듯싶지만, 결국 기적처럼 살아나며 불사의 능력을 깨닫는다. <네버다이 제인>은 뉴로와 동류라 할 만한 제인의 정체성에 의문을 던지는 동시에 그녀의 쓰라린 유년기를 더듬는다. 물론, 총알 세례 속에서도 끝내 적의 목을 움켜쥐는 불사의 액션은 그것만으로도 흡족한 눈요기다. 제인 역의 크리스티나 로큰은 <터미네이터3>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지옥 끝까지 따라붙는 살인병기 T-X로 한국 관객에게도 얼굴이 친숙한 배우. 온갖 능력들을 전시하듯 펼쳐 보인 <히어로즈>에 비해 상대적으로 김이 샐 수도 있지만, 현란함보다는 고전적인 맛을 앞세운 대결구도와 압도적이되 고뇌를 잊지 않는 미모의 여전사는 시선을 붙들어매기에 충분하다.

[TIP] <네버다이 제인>의 원작은 <데어데블>의 작가 콤비 조 퀘사다와 지미 팔미오티가 1995년 탄생시킨 만화다. 2005년에는 TV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이때 제인은 <스몰빌>의 닥터 헬렌, 에마뉘엘 버거가 연기했다.

파이 메이커, 손가락 하나로 생사를 가르다

<푸싱 데이지> Pushing Daisies

죽은 자를 되살리는 능력은 신의 아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파이를 남달리 사랑하던 소년 네드는 트럭에 치어 죽은 애완견을 손가락 하나로 되살리면서 자신의 비범한 능력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 능력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으니, 생명을 되살린 뒤 1분이 지나면 근처에 있는 다른 이가 대신 죽게된다는 것이며, 한번 되살린 이와 두 번째로 접촉하면 그 또한 영원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푸싱 데이지>는 다소 복잡한 이 공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동화적 수사극이다. 파이 메이커로 성장한 네드는 사설탐정 에머슨과 함께 현상금을 겨냥한 부업을 한다. 즉, 살해당한 자를 잠시 되살려 1분 안에 사건의 진상을 들은 뒤, 다시 잠들게 하는 식이다. 문제는 어느 날 그가 관 속에서 어린 시절 첫사랑 척을 마주치게 됐다는 것. 끝내 그녀를 다시 죽음으로 돌려보내지 못한 네드와 졸지에 되살아난 척, 퉁명스런 에머슨은 얼렁뚱땅 한팀을 이룬다. 설탕으로 코팅한 듯 달콤한 캐릭터와 유머를 곱게 포장하는 것은 <아멜리에>와 <찰리와 초콜릿 공장>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듯 알록달록한 프로덕션디자인. 동화책을 펼쳐놓은 듯 악당마저 귀여운 <푸싱 데이지>는 난도질과 피범벅에 지친 이들에게 기분 좋은 휴식이 될 법하다. 미국에서 파일럿 방영 당시 1400만명의 시청자를 브라운관에 붙들었다.

[TIP] <푸싱 데이지>의 각본을 쓴 것은 <히어로즈>의 작가이자 제작자로 명성을 높인 브라이언 풀러다. 또 시리즈의 총제작을 맡은 것은 <맨 인 블랙>의 배리 소넨필드 감독으로, 2편의 에피소드를 직접 연출했다.

애인 약혼자의 고등학생 딸과 원 나이트 스탠드를!?

<캘리포니케이션> Californication

그때 그 시절 <X파일>의 멀더에게 애정을 품었더라면, <캘리포니케이션>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오랫동안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제대로 물을 만났다. 다만 이번에 그가 집착하는 것은 외계인과 UFO가 아닌, 여자와 섹스다. 한때 주목받는 작가였던 행크는 5년째 후속작을 내지 못한 채 지리멸렬한 일상 속에서 허우적대는 중이다. 함께 아이를 가졌으나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고 헤어진 옛 연인 카렌은 다른 남자와 약혼하고, 행크는 그녀의 마음을 돌리고자 하지만 방탕한 생활을 쉽사리 청산하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원 나이트 스탠드를 했던 여성이 카렌의 약혼자의 고등학생(!)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의 삶은 말 그대로, 중년의 위기에 봉착한다. <캘리포니케이션>은 이야기의 배경인 캘리포니아와 간통이라는 뜻의 ‘포니케이션’(fornication)의 합성어.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성적 표현이 상당한 수위를 넘나든다. 남-여, 남-여-남, 남-여-여 등 다양한 조합의 침대 풍경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듀코브니는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나쁜 남자의 궁극을 보여준다. 술에 찌들어 반쯤 혀가 꼬인 목소리로 ‘fuck’을 연발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가족을 향한 헌신적 애정을 슬며시 꺼내놓는 그는 여성 관객의 심박수를 높이기에 충분하다.

[TIP] 수녀와의 성적 판타지를 넘나드는 표현력(?) 탓에 보수 단체들로부터 집중포화를 받았으나, <캘리포니케이션>은 만족스런 시청률을 수확함과 동시에 듀코브니에겐 상복의 기쁨까지 안겨줬다. 1993년 <X파일>로 골든글로브 TV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그는 <캘리포니케이션>으로 14년 만에 다시금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24>에 담은 <사랑의 블랙홀> + <나비효과>

<데이 브레이크> Day Break

아침 6시18분, 형사 브렛은 연인 리타의 침대 위에서 달콤한 아침을 맞이한다. 하지만 평온한 듯 보였던 일상은 어느새 악몽으로 탈바꿈한다. 집안은 도둑이라도 든 양 엉망이 되어 있고, 이윽고 들이닥친 경찰들이 그를 살인 혐의로 체포한다. 감옥에 수감된 브렛은 납치당해 공사장처럼 보이는 곳으로 끌려가고, 두건을 쓴 무리로부터 거짓 자백할 것을 강요받는다. 리타가 총에 맞아 숨지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을 보고 절규하던 브렛은 마취당해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시 아침. 시계는 정확히 6시18분을 가리키고 있고, 리타가 옆에 잠들어 있다. 악몽을 꿨던 걸까? 하지만 모든 것이 똑같이 반복되고 그는 역시 살인 혐의를 뒤집어쓴다. <데이 브레이크>는 <사랑의 블랙홀>과 <나비효과>를 뒤섞어 <24>의 그릇에 담아놓은 듯하다. 반복되는 24시간을 거듭 살아가며, 그는 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한다. 오늘 발견한 단서를 내일(혹은 또다시 반복되는 오늘)에 적용해 사건의 행로를 바로잡으려 하지만, 작은 변화가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지는 ‘나비효과’들은 그를 곤경에 빠뜨린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설정을 취하고도 무수한 변수들을 가지치듯 제시하며 이야기를 예상치 못한 지점까지 끌고 가는 내공이 만만치 않다. 탈출구라곤 없어 보이는 살인의 블랙홀. 두뇌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할 이들에게 지극히 흡족할 퍼즐이다.

[TIP] 죽었다 살아나기를 반복하는 리타는 한국계 배우 문 블러드굿이 연기했다. LA레이커스의 치어리더, 모델, 가수 등 다채로운 커리어를 거쳐 연기를 시작한 블러드굿은 현재 캐치온에서 방영 중인 미드 <저니맨>에도 등장한다.